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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Apr 26. 2018

난 작가가 되려 했다

난 미술작가가 되려 했다. 작가라는게 어디서 인증서 같은걸 주는건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면 작업을 꾸준히 하며 살려고 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면서 혼자, 혹은 동료들과 작업실을 구해서 그림을 그렸다. 한 달에 적게는 십몇만원, 많게는 삼십몇만원을 들여 여기 저기 옮겨다니며 공간을 유지했다. 당시 화실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80만원 가량 벌었으니 꽤 벅찬 일이었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에겐 당연히 작업실이 있어야 하니까.

그땐 작업실에 오래 있다가 오면 하루를 꽤 잘 산 것 같았고, 작업실에 가지 않은 날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 공간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뭐라도 하나 끄적거리고 색이라도 칠하고 화판이라도 하나 만들어 놓으면, 내가 의미없는 일에 시간을 쓰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다르게 말하면 의미없이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일까봐 두려운 시절이었다.

한겨울, 보일러 쌩쌩 잘 돌아가는 따뜻한 집에서 나와 아무리 전기난로를 틀어도 입김이 나오는 차가운 작업실에 들어가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을 받아 그림을 그리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헝그리정신따위 없는 나는 작업이 의미없다는 생각에 빠졌고 삶의 안정감을 몹시 갈망하게 되었다.

나는 임용시험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작업실을 정리했다. 작업실에서 쓰던 집기들과 도구, 화판들을 집에 가져다놓았다. 집이 어수선해졌지만 임용이 되면 곧 다시 쓸 것들이니 잘 보관해두었다.

공부하느라 1년, 임용된 후 직장생활 적응에  곧바로 연애와 결혼준비로 1년, 결혼하고 삶이 매우 안온해져서 2년, 임신하고 아이 낳고 1년...

5년.
그 동안 작업실에서 가져온 짐들은 몇 번의 이사에도 끈질기게 창고와 방 한 구석을 차지하며 따라다녔다. 펼쳐지진 않고 늘 그렇게 쌓여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작업실에 가지 않은 날 저녁에 느꼈던 그 마음. 해야 할 일을 미뤄놓은 찝찝함.

그러나 그 찝찝함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졌다. 직업은 적성에 잘 맞았고 내 마음을 쏟아야 할 고민과 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가정이 내게 준 안정감과 행복감은 매우 컸다. 시간이 갈수록 작업을 하며 살려고 했던 내 마음은 과거형이 되었다. 때론 그런 내가 싫었다. 현실에 안주해 이상 따위는 없는 소시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마음은 사실 거짓이었다. 왜냐면 나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작업할 때 난 늘 불안했다. (심지어 작업의 주제가 불안이었다.) 소시민적인 안정감을 원하는데 그게 없으니 불안했다. 어렸고 한번 해 보기로 한 거니 몇 년 버텼던 거지, 그 정도면 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작업이 절실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말 하는 사람이다. 그게 질문이든 선언이든 뭐가 됐든, 세상에다 대고 뭔가 할 말이 있어야 했다. 있어야 한다는 건 아는데 없으니 맨날 고민이고 어려웠다.


지난 5년간 나는 작업만 안 했지 벼라별 일을 다 했다. 분주하게 살았고 많은 사건을 겪었다. 그래서 그런가... 요새 정신에 여백이 좀 생기니 자꾸 글을 쓰고 싶다. (아직 지능이 애완동물 수준인 아기와 있다보니 머리 속이 재부팅된 느낌이다. 여백이 많다.) 정신에만 여백이 생겼지 몸은 내 인생 최대치로 바빠서 도무지 시간이 없어 잘 못 쓰지만. 쓰고 싶은 글의 주제를 핸드폰 메모장에 간단하게 입력 해 놓은게 오늘 보니 무슨 책의 목차 같다.

이제서야 내가 할 말이 참 많은가보다.

사는게, 그 때는 참 답답하고 알쏭달쏭한데, 지나고나서 보면 재밋다. 그 때 내 작업이 꽤 괜찮아서 주목받는 신인작가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땐 제발 그렇게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별로 하고 싶은 말도 아닌데 진짜 중요한 말처럼 폼잡고 다녔겠지. 그러면서 소시민적인 갈망을 마치 불경스러운 것처럼 숨겼겠지.

현실과 타협한 꿈에 대한 합리화라면 정확히 맞다. 그 꿈이 지금은 전혀 의미가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단지 좀 여유가 생겼달까. 일단 잘 살아보고 내가 뭔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보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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