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날 Jan 03. 2024

창작에 대한 생각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고, 보이고 싶어 한다. ‘만들고 싶다’와 ‘보여지고 싶다’는 두 가지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노래던 글이던 그림이던, 지나가고 나면 그만일 남다를 것도 없는 생각과 감정들을 왜 나는 구체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내고 싶을까, 그리고 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을까?


 큰 상실을 겪었다. 이후 상실에 대한 글쓰기는 나에게 치유의 도구였다. 쓴다는 행위 자체가 나를 제자리로 갖다 놓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 그 글이 내 일기장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공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읽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냥 쓰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다. 사실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읽힐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쓴다는 것이 이타적인 행위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자고 쓴 글이 꼭 보여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읽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나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과물이 그 자체로 좋은 창작인지에 대한 판단은 일단 덮어두고, 나에게 창작이라는 행위의 목적은 보여지기 위함인 것 같다. 창작물을 통해 변환된 자아가 광장에 드러나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있다. 그 장면을 관망하면서 나는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창작물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창작물에 나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담지만 실은 그 안의 화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라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상화된 나 자신이다. 그러니까 창작 이전에 나에게는 방향성이 있는 것이고, 그 방향은 실제 나와 원하는 나 사이의 간극이다. 그것을 실제로 메울 수는 없어서 창작을 통해 마치 그러한 간극은 없었던 것처럼 가장하고 창작물 안의 가상의 나라는 인물이 세상을 향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희열일 수밖에 없다. 실은 살아갈 힘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비로소 내가 원하는 내가 되었다는 승리이다. 그런데 그 승리감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간극이 너무 커서는 안 된다. 아예 거짓말을 해버리면 스스로를 설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구와 보여지고 싶다는 욕구는 같은 것이다. 내가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결국 나라는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나는 창작물 안에 적당하게 확장된 자아를 담아내고 싶고, 그것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길 원한다. 그래서 나의 결과물이 ‘대중적’이 되는 것에 성공하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창작은 건강한 걸까? 거기까진 잘 모르겠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