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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Jun 19. 2018

그리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20년 전 쯤, 중3이었던 내게 있었던 특별한 시간. 그 때가 다시 생각났다


오늘 날씨가 좋다. 볕이 참 좋은 날이다. 더위를 피해 벤치에 잠시 앉았다. 가벼운 산문집을 펼쳤다. 그 순간 눈 앞의 평범한 장면이, 아름다웠다.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정말 눈 앞에 놓여있는 상이 아름다웠다.


등나무 사이로 햇살이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겹쳐져 떨어지고 있었고 바람에 따라 조금씩 반짝이며 움직였다. 아른한 빛들은 내가 벗어놓은 신발 위에도, 촘촘히 박아넣은 보도블럭 위에도, 무심히 벗어놓은 배낭 위에도, 아무 의도 없이 떨어졌다.


그림을 그리는 상상을 했다. 인상주의자처럼 어른거리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자 색 위에 미묘하게 다른 밝은 색들을 만들어 반투명한 농도로 찍어나갔다. 짙은 색의 기둥은 과감하게 어두운 색으로 위에서 아래로 쭈욱 밀어낸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때 그 시간이.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걸 좋아했다. 엄마는 온갖 이면지를 모아 나에게 안겨주었다. 해가 지난 커다란 달력을 구해온 날은 함께 매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달력의 뒷면을 채우고 또 채우며 하루를 보냈다. 그 시절부터 십대에 들어서기까지 계속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언젠가부터 내 그림은 만화였다. 등장인물을 만들고 대사를 넣고 그러면서 놀았다.


그 때 까지의 내 그림은 모두 상상이었다. 미술학원에 다녔다면 보이는 걸 그대로 그리는 방법을 배웠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엄마도 보내보긴 했는데 내가 한번 가고는 싫다고 하자 그만 두라고 했다.


중3때 미술을 전공하기로 결정했고 처음으로 미술학원에 갔다. 용감하게 예고를 목표로 했다. 예고 입시를 통과하려면 당연히 입시미술을 배워야 했다. 빛의 단계를 내는 방법, 형태를 잡는 방법, 색을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 미술의 방법엔 답이 없을지 몰라도 입시미술엔 답이 있었다. 하루 빨리 답을 익히기 위해 미친듯이 그렸다.


그렇게 눈과 손에 익은 입시미술이 어린 학생들의 미술적 발전에 득이냐 실이냐를 얘기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잘 보아야 했다. 그리는 걸 좋아했고 엄청 많이 그렸지만 학원에 가기 전엔 무언가를 그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관찰해서 그려본 적은 없었다. 주전자 하나를 그리기 위해서 눈동자는 주전자와 종이 사이를 몇백번은 왔다갔다 해야 했다. 그런 집중적인 훈련을 몇달간 받다보니 보이는 것에 변화가 생겼다.


세상 만물이 다 그려야 할 대상으로 보였다. 이건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구체적으로 연필이나 붓으로 저 대상을 어떻게 그려야 실감이 날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교실 창가에 앉은 친구의 머리카락을 보면 햇살이 닿아 하얗게 빛나는 부분부터 새카만 그림자가 진 부분까지의 명암단계와 매끈한 질감을 연필과 지우개로 슥슥 그려나가는 상상을 했고, 물이 담긴 병을 보면 수채화로 투명한 느낌을 살려 채색하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세상을 보니 참 재미있었다.


더 잘 보게 되었다기보다는 새로운 방법으로 보게 되었다. 나만의 독창적인 시각이 아니라 속성으로 배운 입시미술의 시각이었지만 여하튼 새로운 시각의 틀이 생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릴 게 너무 많아서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그렸다. 보이는 게 많아서, 그게 진짜 재미있었다.


그렇게 미친듯이 그림을 그려 예고에 들어가서 또 대학가려 미친듯이 그리는 사이 그 전의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냈던 캐릭터들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만화 비슷한 것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대학에 가서는 입시미술에 젖은 습관을 하루빨리 버리는 것이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자연스레 입시미술은 우리에게 획일적인 것, 고인물, 악습, 부끄러운 과거? 뭐 그런 것들이 되었고 다신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원래 나에게 있던 창의성이 그놈의 입시미술 때문에 처참히 짓밟혔고, 그래서 지금 내 그림이 이모양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잊어버렸다. 그때 그 시간을.

세상 모든 것이 그려야 할 것으로 보이던 그 시간.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그려볼 수 있을까 막막했던 그 때의 나.


그땐 내가 앞으로 남은 생을 그리는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갈거라 생각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참 좋아서 나는 미술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고 했겠지. 그 눈을 잘 키웠으면 세상을 독창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었을까. 늦지 않은걸까.


여하튼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때의 나야 잊어버려서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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