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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May 29. 2018

식기세척기를 사세요.

대학 때 부전공이었던 사회학 강의 중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강의가 있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주제는 문화에 대한 사회학적 시각들에 관한 것이었다.


교수는 첫 강의었던 오리엔테이션을 제외하고 한 번도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지 않았다. 모든 수업은 학생들이 팀을 이뤄 함께 공부하고 준비해야 했고, 수업을 준비한 팀의 발제로 토론이 이루어졌다.


미대생이었던 나에게 이런 수업 방식은 엄청나게 어려웠으나 너무나 새롭고 흥미로웠다. 배움이라는 게 이렇게 힘들고 즐거운거구나. 라는 걸 그 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수업이 아직까지도 종종 기억날 정도로 강렬했던 이유는 이런 수업 방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교수는 좀처럼 웃지 않았고 학생들이 허덕이며 준비한 발표와 발제에 대해서 촌철살인의 비판을 퍼부었다. 몇 번은 앞에 나온 학생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팀플을 위해 모이면 수업도 안 하고 지적만 하는 교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 서로 친해지곤 했다.


하지만 그 불만 성토의 장은 늘 이렇게 끝났다.

"그래도 인정할 수 밖에 없어."


교수는 내가 여지껏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균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감정적이지 않았고, 어느 입장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물론 그 분야를 20년 정도 연구한 학자가 학부생들의 발표에 적절한 지적을 가하는게 얼마나 쉬운 일이겠냐만은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 사례로 설명할 수 있겠다.


당연히 우린 그 분을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하고 누군가가 손을 들자 "왜 저를 교수님이라고 부르죠?" 라고 물었다. 순간 정적이 흐르자 "여러분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교사님이라고 불렀나요? 혹은 시간강사 선생님은 강사님이라고 부르나요?"


그 호칭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았다. 교수는 호칭이 아니라 직위인데, 교수님이라는 호칭은 교수라는 직위가 갖는 권력(교사나 강사에게는 없는)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고, 이런 호칭을 아무 생각없이 쓰는 사이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던지, 자신을 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호칭을 생략하라고 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고, 그 분의 태도와 말들 모두 멋지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는 거의 팬심으로 그 수업을 향했는데, 조금 실망을 한 적도 있었다.


그 분은 결혼을 했고 대학생인 아들이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페미니즘이 주제였던 날, 성역할 불평등에 대해 토론하다 이례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본인이 강의나 연구에서 공평함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부끄럽게도 남편과 본인 사이의 불평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자나 후배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식기세척기를 꼭 구매하라고 추천한다고 했다. 본인은 설겆이가 너무 싫은데 남편과 누가 설겆이를 할 것인가의 문제로 빚어진 오랜 갈등이 식기세척기를 구매하며 손쉽게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 이야기가 얼마나 어이 없었던지.

식기세척기를 사라고?

대화와 상호이해의 중요성을 역설하시던 당신이. 더군다나 논리로 무장한 당신의 언변은 대체 어쩌고. 식기세척기?

강단에서는 그렇게 강조하던 평등을 대체 왜 가정에서는 포기한거지?

...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작년에 식기세척기를 샀다. 쓰면서 종종 그 분이 떠오른다. 이걸 사라는 그 말씀은 몇 안 되는 인생의 조언이었구나. 어리고 무지한 내가 그 때 얼마나 오만했던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보고 알았다. 가정이란 것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의 장인지. 매우 사회적인, 매우 개인적인 문제들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가정임을. 승리도 패배도 없는 복잡다단한 이해와 어긋남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이 곧 답이 아닐 때도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요새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그런다. 식기세척기 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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