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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Sep 21. 2018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도서관에서 새로 들어온 책 서가에 서서 책등을 무심코 훑다가 어떤 책 제목이 훅 들어왔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뭐지 왜 익숙하지.. 도대체 어디서 들어봤지.... 왜 기분이 이상하지?!


그 책을 꺼내들어 저자소개를 봤더니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라는 힙합그룹의 멤버였고 현재는 글을 쓰는 것 같은 손아람이라는 작가였다. (출간된지 10년은 된 책이라 확실치 않다.) 이 소설은 그 시절을 소재로 한 자전적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게 힙합그룹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머리 속에 무슨 노래인지 모를 한 구절이 팅 지나갔다. " 진시리 말쏘된 페이제이~" (약간 얍삽한 목소리)

그걸 대출해와서 순식간에 읽었다. 이 사람의 농담 방식이 처음에는 약간 너무 세기말적이라서 뭐야 이거.. 했는데 정신차려보니 이미 빠져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내 청소년기의 한 조각을 난데없이 상기시켰다.

나의 10대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있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 그때 난 김진표의 팬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이불 속에서 몰래 워크맨으로 12시에 시작하는 김진표의 야간비행을 들으면서 시작된 듯 하다. 그때는 PC통신의 시대였다. 그 라디오프로그램은 PC통신으로 실시간 채팅을 하면서 청취자들과 대화를 하는 선구적인 포맷을 선보였다. 지금은 보편적인 방식이지만 그때만해도 라디오에서 주로 엽서로 온 사연을 소개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바야흐로 인터넷의 세상이 도래하면서 김진표는 JPHOLE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제작해서 운영했는데 거기에 모여든 사람들이 자유게시판에 글도 쓰고 채팅도 하고 정모도 하고 그랬다.


나는 거기서 아마도 최연소 멤버였고, 나에게 그곳은 완전히 끼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약간 존재감이 있었으면 좋겠는... 뭐 그랬던 것 같다. 사춘기때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애매모호한 태도였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슬쩍 껴서 술집도 가보고 어쩌다 데이트 비슷한 것도 해보고 그랬다. 그러면서도 주변 친구들에게 내가 그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뭔가 쪽팔린 구석이 있었나보다.


그곳의 사람들과 김진표는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잊혀졌.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시절을 추억할 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 나에게 그 시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에서 빠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 때 나는 남들과 다르고 싶었다. 중학교때까지는 HOT와 젝스키스에 대한 사랑에 빠져있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고 싶었다. 나는 김진표를 좋아하면서 랩과 힙합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나의 취향이 좋았다. 그런데 예술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자 내가 모르는 심오한 예술적 취향을 가진 아이들이 내 삶에 등장했고 어떤 아이들은 내게 동경의 마음을 가지게도 했다. 나는 새로 만난 친구들을 따라 다니며  미술전시도 보고 필름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커피도 마시며,  그리고 처음 접해본 영국의 모던락을 들으며 조금 다른 방향으로 자기개념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십대를 보낸 후 이십대는 홍대에서 보냈다. 통기타, 어쿠스틱, 지하공연장, 대안공간, 작업실 뭐 이런것들이 나를 이룬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저 소설이 접어서 어딘가 넣어두었던 내 성장기의 한 페이지를 불쑥 꺼내 버렸다. 내 방 서랍속에 가지런히 쌓여있던 CD에 적혀있던 글자들, 김진표, 조pd, 주석, 마스터플랜... 이런 글자들과 함께 그 때의 분위기와 내 마음과 몇몇 기억들과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떠오르기 시작하니 너무 재미가 있어서 아 그때 그런 일도 있었지, 그런 사람도 있었지... 맞아 내가 그랬었지.... 하다보니 새벽 1시가 지나 있었다. 좀 읽다 자야지 하고 책을 들고 침대에 앉은지 한 4시간은 지나 있었다. 그렇게 과거의 시간 속을 헤매는데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남편이 실눈을 떠 나를 본다.


"또 잠이 안 와?"


눈도 제대로 안 뜬 채로 스르륵 일어나더니 침대 아래쪽에 걸터앉아 내 발을 주무른다. 이렇게 하면 늘 자더라. 하면서.


옛날 생각을 자주 하기 시작하면 나이 드는 거라고 하던데. 과거의 내가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이제 꼰대가 되는건가?


영문을 모르는 남편에게 중얼거리면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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