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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Sep 27. 2018

2011년의 일기로부터

전에는 책상 위에 메모지나 노트, 종이쪼가리들이 언제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종이를 쓸 일이 통 없다. 쪽지를 하나 쓸 일이 생겨 종이를 찾다보니 몇 년 전에 쓰던 노트 하나를 뒤져서 찾아냈다. 반 정도 쓰다 만 일기장이었다. 날짜를 보니 2011년.


어느 날의 일기를 읽었다. 춘천에 가서 엄마를 만나고 돌아와서 썼나보다. 엄마와의 대화가 불편했다고 쓰여 있었다. 엄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 즐거운데 이상하게 불편했단다. 그 이유는 엄마의 나에 대한 기대와 그걸 충족시키고 싶은 나의 욕망이 자꾸 나를 솔직하지 못하게 해서였다. 있는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없고 자꾸 엄마의 기준에 나를 검열하게 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런 문장도 있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 순 없다고.


맞다. 엄마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감정을 주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사랑은 조금 찐득거렸다. 난 그 사랑에 때론 기댔지만 많은 순간 허덕였다. 엄마는 늘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이야기했고 그런 말들은 나를 스스로 존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지만 한편으론 (엄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의 사랑이 찐득거렸던 이유는, 진실로 엄마에게 내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성격, 엄마의 재능, 엄마의 취향, 그리고 엄마의 삶을 생각해 보면... 엄만 늘 목말라 있었다. 엄마의 내면에 가득 담긴 그 에너지와 이미지와 말들은 세상에 마음껏 튀어나와야 했지만 그럴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내가 미술을 전공하기로 했을 때 엄마는 너무나도 기뻤다고 한다. 대부분 친구들은 미술을 하기 위해 부모의 반대를 꺾어야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꿈이 화가였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것저것 배우고 돌아다닐 때도 엄마는 내 생활을 재미있어 하고 좋아하셨다. 내가 기타를 배우고 친구들과 아마추어밴드를 만들어 공연을 할 때는 동영상을 찍어 친구들에게 마구 자랑하기도 했다. (친구들의 반응은 신기하네... 정도)


반면 엄마는 내가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재력이 있는 집안에  전문직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미술을 하는 건 좋지만 유학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좋은 옷을 입고 다니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엄마는 나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아 욕망을 투영하면서, 동시에 자식을 걱정하는 전형적인 어머니의 바람을 끊임없이 표현했던 것이다. 아마 스스로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혼란스러웠다.


생각해보면 나에 대한 엄마의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조금 모질게 말하면) 바람직한 부모의 태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곁에 있을 때 엄마의 죽음 이후를 종종 상상했다. 엄청나게 슬프겠지. 그리고 엄마에게 이렇게 저렇게 상처주었던 것들이 후회되겠지. 그리고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겠지. 그랬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가 지금 아프진 않지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엄마에게 모질게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아리긴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고 해서 엄마라는 존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달라지지 않지. 엄마의 바람, 기대, 모순, 불편함, 찐득거리는 사랑... 모두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나의 그리움은, 완전한 존재로 기억되는 엄마에 대한 것이 아니다.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넘어서려 했던, 그러면서도 주위를 뱅뱅 돌며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한 인간, 엄마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만나면 너무나도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게 아니라, 다시 만나도 수시로 투닥거리고 서로 삐치고 미워하곤 하겠지만.... 그럴 수 있다면 정말 다시 그러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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