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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Nov 08. 2018

10인용 압력솥


엄마가 불 위에 올려놓은 압력솥이 취취취-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나는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엄청난 압력에 의해 냄비가 돌연 폭발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아마도 어릴 때 엄마는 나에게 압력솥 뚜껑을 함부로 열지 말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었을테고, 그 주의의 내용이 '폭발해버릴지도 몰라.'였겠지. 뿐만 아니라 그 소리가 좀 무섭기도 했다. 그 무서운 압력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은 우리 집에 엄마밖에 없었다. 나는 비교적 요리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는데도 압력솥 만큼은 도전하지 못했다. 물론 결혼을 하면서 주방도구들을 구입할 때도 압력솥은  리스트에 없었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는데 우리집에 오는 중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도착한 엄마의 손에 4인용 압력솥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일산에서 하는 리빙페어에 볼 것이 있어서 춘천에서 그곳까지 갔는데 요 자그마한 압력솥을 보자마자 나에게 주고 싶었단다. 그래서 지하철 몇 번을 갈아타며 미아동에 있던 신혼집까지 그걸 들고 왔다는 것이다. 택배로 보내면 될 것을 뭣하러 그 먼 길을 힘들게 왔냐는 나에게 엄마가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모르겠어. 왜 그렇게 이걸 바로 너에게 주고 싶던지. 너무 주고 싶어서 힘든지도 모르고 왔어."


지금 생각해 보니, 압력솥도 압력솥이지만 나를 볼 핑계가 하나 생긴 것에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결혼을 하고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닌데, 그 당시에 엄마는 많이 외로워했었다. 그때 더 반가워할 것을. 택배로 보내지 그랬냐는 말은 하지 말 것을.


그 압력솥은 그 날 수납장에 들어간 뒤로 한참동안 세상 구경을 못 했다. 엄마는 이걸로 밥을 지으면 훨씬 맛있고, 고기를 익히면 훨씬 부드럽다고 했지만, 도무지 압력솥과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줄이기가 어려웠다. 스마트폰을 쓰고 싶지 않은 노인의 마음과 비슷했을까.


그러다 어느 날 냄비에 눌러붙은 누룽지에 물을 끓여 먹는 숭늉이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친절한 블로거의 도움을 받아 압력솥으로 밥하기에 도전을 했더니 과연 찰지고 구수한 밥맛이 전기밥솥의 밥과 비교가 안 되었다. 그 때부터 밥 뿐만 아니라 찌고 삶는 요리에 두루두루 사용하게 되었고, 소리와 냄새로 불을 언제 꺼야 하는지 감이 오는 수준에 도달했다. 최근 아이 이유식을 하면서부터는 매일매일 주방에서 취취취-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지난 주말 남편 생일선물을 사러 경기도의 아울렛에 갔다가 세일하는 10인용 압력솥을 보고 남편 소매를 흔들었다. 뚜껑을 열어보고는 "와, 여기 닭 두마리 들어가겠네!" 하며 밝은 표정을 지었더니 그 또한 밝은 표정으로 카드를 꺼냈다. (물론 남편 생일선물로 압력솥을 산 건 아니었다.)

크고 반짝이는 새 압력솥에 닭 두마리와 찹쌀, 마늘, 파 등을 넣어 불 위에 올리고 식탁에 앉았다. 빌려온 소설책을 좀 넘기다 보니 고소한 향이 온 집에 퍼진다. 턱을 괴고 생각한다. '5분 뒤에 불을 꺼야지....'

이런 내가 기특하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언제 이렇게 커서 압력솥을 2개나 가진 사람이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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