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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Oct 15. 2019

나는 텅 빈 운동장 한 켠에 앉아있었다.


나는 텅 빈 운동장 한 켠에 앉아있었다. 꼭 오늘 같은 날이었다. 하늘은 지나 정도로 파고 10월의 투명한 빛에 사물과 식물이 가짜처럼 빛나고 있었다. 교무실 형광등 아래엔 도무지 얼굴을 숨길 곳이 없었다. 숨으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무슨 세상이 이렇게 밝은지. 학교엔 창문이 왜 이렇게도 많은지.


사람들은 나의 슬픔을 짐작할지 모르지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만은 정상으로 살고 있었다. 정상으로 출근하고 정상으로 수업하고 정상으로 밥 먹고 정상으로 웃고 떠들었다. 신기하게도 그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순간이 오면 쉽지 않았다.


"원피스가 참 예뻐요."


멀리서 눈이 마주쳐 목례를 했을 뿐인데 그녀는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계약직 국어교사였던 그녀와는 사적인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몇 달 전 아버지의 부고 메시지를 보았 기억이 났다. 늘 웃는 얼굴이라 괜찮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이런 걸 기하학적 무늬라고 하나요? 하하,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엄마 옷이에요."


우리는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있었던가,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고 했다. 그 집에서 아버지를 보냈다고 했다.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얼마 전까지 그 집에서 혼자 살았다고. 며칠 전 이사를 했고, 이제 좀 낫다고.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각자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구나 마음속에 지옥안고 있는 걸까.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짐작하며 눈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위로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까짓 말. 어느새 찾아온 가을이 이미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괜찮다고. 슬퍼도 괜찮다고. 지옥 하나쯤 안고 있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세상이, 삶이 이미 이렇게 아름답지 않냐고.


그녀는 할 일이 생각난 듯 먼저 일어났다. 나는 그곳에 조금 더 앉아있었다. 시리게 파란 하늘, 구름, 오만가지 색의 잎들을 흔드는 바람...


내 무릎 위 원피스의 기하학적 무늬가 10월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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