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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Oct 30. 2019

또 다른 나의 유희

1년의 휴학 후, 개강 첫날.

3개의 실기실 문에는 각 실에 배정된 학생들 이름이 붙어있었다. 내 뒷 학번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름들이 낯설다. 그 사이에서 내 이름을 찾다가 난데없이 엄마 이름을 발견했다.


나는 김유희를 보기도 전에 좋아하기 시작했다. "유희야!" "야, 김유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거잖아.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마침 같은 실기실이네.


유희의 첫인상은 조금 가웠다. 자기 키보다 큰 화판을 복도에 세워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까만 옷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그 까만 등짝이 말하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내버려 둬.'

그래서 더 안달 났다. 해지고 말겠어.


정작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유희는 차갑기는커녕 어떨 땐 너무 뜨겁다 싶을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느새 가족처럼 가까워졌고 같이 살기도 했다.


엄마도 유희를 좋아했다. 내가 유희 얘기를 하면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유희와 같이 살 때 집에 오면 그 아이의 책이나 살림살이들을 몰래 보면서 감탄하곤 했다. 유희는 뭐가 달라도 좀 다르다며.


정말 유희는 좀 다르다. 유희는 마음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안다. 런 건 타고나는 걸까. 세상 분주한 일들에 마음을 소비하느라 지친 나는 가끔 유희를 만나면 무언가 정리되어 돌아오곤 한다.


유희는 년 엄마의 기일 엄마 그림과 똑 닮은 마른 꽃 한 줌을 건넸다. 유희 씨 갖다 주라며. 올해에도 날 나에게 긴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내 엄마의 세 번째 기일까지 기억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희의 그림과 유희의 사진과 유희의 꽃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있다. 처음 유희를 만났을 때 그랬고 함께 한 많은 시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이 관계에 조금은 무심해지기도 한다. 이제는 삶의 영역이 달라지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가끔 미안하다.


하지만 나의 무심함을 아는 만큼, 나의 속마음도 유희는 알 테니 우린 평생 각자 나란히 걷자. 걷다가 만나서 웃고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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