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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Aug 22. 2019

그놈의 호박죽

엄마는 허구한 날 호박죽을 끓였다. 커다란 들통 가득. 엄마의 호박죽은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손님을 초대했을 때, 다른 집에 방문할 때, 나들이를 갈 때나, 기회만 되면 호박죽을 끓였다.


나는 호박죽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그 주책이 싫었다. 가장 싫을 때는 엄마가 손잡이 달린 빨간색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들고 학교에 올 때였다. 학부모 상담 같은 것을 하면, 그냥 주스 한 상자 사 오면 될 것을 꼭 그놈의 호박죽을 끓여가지고 일회용 그릇까지 준비해와서 교무실에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선생님들은 나를 볼 때마다 너네 엄마 호박죽 정말 맛있었다고 한 마디씩 하셨다. 정말 최악이었다.


나는 그 맛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달긴 한데 끈적이고 먹고 나면 이상하게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다 끓여놓은 죽을 한 숟가락 내 입에 넣으며 "어때, 설탕 더 넣어?" 라고 물을 때 말곤 거의 먹지 않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근 10년동안은, 오랜만에 집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해 주었기 때문에 그 호박죽을 먹지 못 했고,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엔 당연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하지만 그립지도, 아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좋아하지도 않는 호박죽을 다시 먹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직접 끓이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단호박은 달콤하고 소화도 잘 되어서 훌륭한 이유식 재료다. 찹쌀을 넣어 쫀득하게 끓여서 주니 아이가 아주 잘 먹었고, 설탕타서 주니 남편도 잘 먹었다. 그 맘때부터 자주 끓였더니 나름 요령이 생겨서 꽤 훌륭한 호박죽을 끓일 수 있게 었다. 어차피 내 미각이 기억하는 호박죽의 맛은 엄마의 것이라, 간을 맞추다 보면 거의 똑같은 맛이 났다.


어쩌다 보니 손님이 올 때도 호박죽을 끓이고, 나들이 약속이 있을 때도 호박죽을 끓여 싸가지고 나가고, 심지어 외국에서 온 친구에게 한 통 끓여서 갖다 주기도 했다. 이게 재료값도 별로 들지 않고, 과정도 간단한데 꽤 정성들인 음식 같은 느낌이 들며 호불호가 없는 맛이다. 식사로도 괜찮고 간식으로도 괜찮아서 아무 시간에나 어울리고 곁들일 반찬도 필요 없다. 무엇보다 다들 맛있다며 잘 먹어주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학부모가 학교에 커피 한 잔도 사갈 수 없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려나. 엄마가 이런 날 보면 뭐라고 할까. "기지배, 니나 나나!"하며 깔깔 웃을까, 웃다가 조금은 씁쓸해할까. 아니면 언제 이렇게 다 컸냐며 엉덩이를 두드려 주려나.


노오랗고 찐득하게 끓여진 호박죽 한 숟가락을 떠서 맛을 본다. 고개가 갸웃. "엄마, 이리와 봐. 설탕 한 숟가락 더 넣을까?"


엄마의 대답이 들리는 것 같다. 그놈의 호박죽 때문에 눈이 또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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