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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Jan 14. 2019

좋은 하루


최근 나의 관심이자 목표는 '좋은 하루를 보내는 것'.


자주 만나는 조리원동기(!) 언니가 있다. 대화 중에 그 언니가 아기를 데리고 미술관을 자주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혀 관련 없는 전공과 직업을 가진 언니가 전시 보는 걸 좋아해서 미술관으로 아이와 외출을 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최근에 전시를 본게 언제였나 생각을 해 보았다. 까마득...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은 아이의 즐거움을 위해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요새 아이가 한창 걷기 시작해서 넓은 공간을 발발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다 보니, 바깥은 너무 춥고 가는 곳은 매번 마트나 쇼핑몰이었다. 소비를 위한 공간이다 보니 돌아다니다 보면 뭔가 사게 되고 군것질도 하게 되고... 그래도 체력을 소진하고 집에 와서 곯아 떨어진 아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뭐, 하루 잘 때웠네."


평일엔 혼자 겹겹이 아이 옷 입히고 먹을 것들 챙겨 나가는 일이 그냥 생각만 해도 번거롭고, 주말에 다녀온 쇼핑몰 또 가고 싶지도 않고 장도 이미 봤고... 별 약속이 없으면 그냥 쇼파에 멍하니 앉아 혼자 노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깜빡 졸다가 아이가 와서 무릎에 앉으면 멍한 표정으로

 "어, 엄마도 모르게 잤네.. 너는 안 자니?"


내가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주말.

남편과 함께 있으면 아이 돌보는 것도 쉽고 함께 외출하는 재미도 있다. 아이와 셋이 앉아 외식을 하는 것도 즐겁고.

그래서 평일의 나는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고 남편과 함께 하는 주말을 기다릴 뿐. 이러니 그 사람은 또 얼마나 부담스럽겠나.



아이와 단둘이 미술관에 간다는 그 언니의 말이 정말 신선하게 들렸던 것은, 내가 바보 같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이와 함께 하는 것 말이다.



지난 주 어느 날, 낮잠을 자고 보얗게 일어난 아이를 든든히 먹이고 차에 태워 삼청동의 현대미술관에 갔다. 가기 전엔 '전시실에서 소리지르면 어쩌지.' '괜히 고생만 하다 오는 건 아닌가..' '차 막히고 아이 울면 진땀 뺄텐데..' 이런 저런 걱정에 그냥 집에 있을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모두 기우였다.


 아이는 카시트에 점잖게 앉아 창 밖에 지나가는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즐거워했고, 드넓고 텅 빈 미술관 복도를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 즐거웠던 순간은 조용한 전시실에서 유모차 손잡이를 꼭 잡고 그림을 구경하느라 눈동자가 왔다 갔다 하는 아이를 볼 때였다. 사람들은 "어머, 아기도 전시를 보네." 하며 웃어주었다. 그에 못지 않게 즐거웠던 순간은 미술관 카페에서 나는 밀크티, 아이는 주스를 한 잔씩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때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는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내내 깔깔거렸다.


정말 즐거운 외출이었다. 좋은 하루를 보냈다.


그냥 미술관에 잠시 다녀온 것 뿐인데 나에겐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래. 좋은 하루를 보내자.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손에 잡히지 않고 괜한 죄책감만 남는다. 그냥, 좋은 하루를 보내자.


찾아 보니 날씨가 좋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공간이 서울 시내에 꽤 많다. 주말엔 서울을 벗어나 근교로 나들이를 가도 좋을 것 같다. 좀 추운 날에도 든든히 입혀서 바깥 산책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집에서도 매번 보는 책과 장난감 말고 빈 병이나 박스, 주방도구 같은 것들로 같이 놀 궁리를 좀 해 봐야겠다.



1년 후면 복직이다. 조금 있으면 어린이집도 가고. 아이는 쑥쑥 큰다. 그러고 보니 아이와 단 둘이 보내는 평일 낮의 느린 시간은 이 시절이 유일하다. 그리고 이 시절을 기억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나다. 좋은 하루들이 쌓이면 지루한 기다림의 날들이 아니라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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