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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Sep 19. 2019

지나친 사람과 지나치지 않은 사람

1.

20대 중반쯤이었을 거다. 홍대 근방에서 자취를 할 때였는데,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둑한 골목길이라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리는 뒤에서 났다.


그냥 뛰어갈까 돌아볼까 고민하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한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다가가 보니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다치지는 않았고 술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하고 말을 걸었으나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고 아들을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신고했어야 했다. 당연히 신고하고 경찰관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을 거기에 그대로 두고 집으로 왔다. 그때 한창 홍대 주변에 범죄가 많이 일어났고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무서웠던 것 같다. 하지만 무서웠으면 그 자리를 떠나면서라도 신고는 했어야 했다.


10년이 지난 일인데, 잊을 만하면 떠오른다. 그때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지나쳤던 것이 이렇게 오래 죄책감으로 남을 줄 몰랐다.



2.

30대 초반, 엄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과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엄마가 다녔던 서울성모병원에 볼 일이 있어 바로 그곳으로 갔다. 고속터미널 역에서 서울성모병원은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거리다. 역에서 나와 횡단보도로 걸어가는데, 한 할머니가 저린 다리를 붙들고 막막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도와드릴까요?" 하니 할머니는 화색이 되시며 성모병원을 가는데 셔틀버스 타는 곳을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웃으며 "할머니, 저 건물이 성모병원이에요. 저랑 걸어가시면 돼요." 그랬더니 "알아, 아는데 내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버스를 타야 돼. 여기 어디인 것 같은데..."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했는지, 물었는지.. 어쨌든 버스 타는 곳을 찾았다. 할머니가 이왕 가는 거 같이 타고 가자고 해서 할머니랑 나란히 버스를 탔다.


할머니는 며칠 전 돌아가신 우리 엄마보다 10살 이상 위로 보이셨다. 젊은 사람이 병원에 왜 가냐 물으시길래 나도 모르게 엄마가 아프시다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도 젊을 것 같은데..." 하며 걱정해 주셨다. 이상하게도 그 짧은 대화가 위로가 됐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약한 존재를 알아보는 것 같다.


홍대 앞에 살던 어린 나는 자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술을 들이부어버린 여자의 비참한 모습이 두려웠다. 이상하게 위협당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사람이 처한 위험을 알아보지 못했다.


엄마를 보낸 후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었던, 지푸라기처럼 약해진 나는, 나처럼 약하고 지쳐 보이는 할머니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다. 난 타인에게 거의 무관심한 편인데 그 날 할머니에게 말을 거는 데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나친 사람과 지나치지 않은 사람, 지나쳤던 나와 지나치지 않았던 나.


그 날 지나치지 않았던 나의 마음을 잊지 않고 싶다. 상처는 이제 그 날 만큼 나를 아리게 하지 않지만, 만약에 상처가 다 아물더라도 지나치지 않는 나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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