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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다 Aug 15. 2016

내가 정말 너무 심각하게
좋아했던 그 애

찌질한 짝사랑 이야기 #1

 내가 25년의 생에서 가장 뜨겁게 좋아했던 사람은 아무래도 그다. 우리 집 옆 건물 에펠탑이 보이는 전망 좋은 집에서 살던, 첼로를 켜는, 바로크 음악과 그런지락을 좋아했던, 키가 컸고 디즈니 왕자님처럼 잘생겼지만 수줍은 미소를 짓던, 말수가 적고 낯을 많이 가리는, 코트를 입으면 진짜 멋있을 텐데 항상 녹색 후드 집업을 걸치고 다니던, 땅에 떨어진 과자를 망설임없이 주워 먹던, 머리를 빙구처럼 잘랐다가 또 밀었다가 하던, 영 이상한 구석이 있던 그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빠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냥 내가 이상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9월의 끝자락 즈음이었다. 친구도 없고 외롭게 하루하루 요리나 하고 산책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숙소에서 공짜 피아노 콘서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살던 곳은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파리시의 지원하에 모여 살며 예술활동을 하는 예술가 기숙사였다. 밥을 대충 먹고 8시쯤 옷을 주섬주섬 끼워 입고 슬슬 내려갔다. 그 날 피아노를 친 이반은 러시아계 미국인이었는데 라흐마니노프를 아주 잘 쳤다. 훤칠한 키에 금발, 빨갛고 보송보송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콘서트 후에 있었던 작은 파티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 일주일 전에 안면을 텄던 엘리나와 대화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뒷풀이에 끌려가게 되었다. 숙소에서 오분 걸리는 아이리쉬 펍의 야외 테이블에서 우리는 앉아서 샹그리아를 마셨다. 오랜만에 사람들하고 술을 먹으니 기분이 미친 듯이 좋아졌고 목소리가 커졌다. 어색한 불어와 더듬거리는 영어를 반반 섞어가며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반의 친구라면서 미국인 둘이 더 왔다. 한 명이 내 옆에 앉았다. 제법 귀엽게 생겼었다. 우리는 통성명을 했고 얘기를 좀 했다. 그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인지 이내 나는 그에게 흥미를 잃었다. 그냥 아 잘생긴 첼리스트구나. 그게 내 첫인상이었다. 나는 술을 진탕 먹고 기분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프랑스는 12시면 모든 술집이 문을 닫기에 우리는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열 명정도가 신나게 떠들면서 걸어 들어왔고 각자의 건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와 이반, 그리고 그가 남았다. 우리는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그도 조금 취한 것 같았다. 그는 한국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이반은 자기는 불고기를 좋아한다고 했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너무 반가웠던 나는 성대한 한국 음식 파티를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일주일 뒤 나는 그와 이반, 엘리나 또 에리카를 초대했다. 하루 전부터 갈비를 재고 김밥 속을 만들고 당일은 아침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김밥을 열 줄 말고 떡볶이를 만들고 또 갈비를 찌고 밥을 했다. 6시가 되었다. 가장 처음 문을 두드린 것은 그였다. 우리는 뺨을 맞댔고 그에게 나는 신발을 벗어달라 부탁했다. 워커를 주섬주섬 벗었다. 나는 갈비를 한다고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다. 주방 문턱에 서서 몇 마디 말을 하다가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고 창밖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는 엄청 많이 먹었다. 기분이 좋았다. 내 한국음식 파티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첼로 연습을 해야 한다면서 먼저 떠났다. 신발을 집안에 가져와서 신는 모습을 보고 약간 기분이 불쾌했다. 내가 하루 종일 쓸고 닦았는데. 그런 사소한 불만들은 곧 까맣게 잊고 나는 기분 좋게 잠들었다. 일주일 뒤 학교가 시작했고 나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날은 머리도 안 감고 퐁피두 센터에 갔었다. 석회질 물 때문에 머리가 한 뭉텅이씩 빠져서 어쩔 수 없었다. 화장은 했었는데 얼마 안돼 녹아내렸다. 그날은 왠지 카페오테크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감상에 젖고 싶은 날이었다. 리셉션 데스크에 가서 우편물을 찾고 카페오테크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데 그를 우연히 마주쳤다. 거의 한 달 만이었다. 비쥬를 하고 잘 지냈냐 잘 지냈다 안부인사를 묻고 그는 로비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나 근처 카페 갈 건데 같이 커피나 마시자라고 말했다. 그는 카페오테크의 커피가 얼마나 맛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옆 건물인데. 나는 카페 알롱제를 시켰고 그도 나를 따라서 카페 알롱제를 시켰다. 카페오테크에서 커피를 시키면 항상 얇고 네모난 초콜릿이 같이 나왔는데 그는 그 초콜릿을 커피에 녹여 먹었다. 나는 초콜릿을 오독오독 부숴먹었다. 서로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제야 제대로 서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너바나와 위저드를 좋아했고 첼로를 켰다. 파리 콩세르바투와에서 공부하고 그런지락 밴드 결성해 거기서 첼로를 켜고 싶다고 말했다. 미시간주에서 살았었고 파리에는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온 적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불어를 제법 유창하게 했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 있었나, 연습해야 해서 올라가 봐야 한다고 했다. 자판기 커피 값인 50성팀밖에 없다고 해서 커피는 내가 샀다. 다음에 거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그가 말했다. 그는 나를 한번 꽉 끌어안고는 집에 들어갔다. 나는 혹시 불쾌한 냄새라도 풍기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 후에는 기억이 약간 뒤죽박죽이다. 카지의 오픈 스튜디오가 먼저였던것 같다. 뒷풀이로 술집에서 모히또와 맥주를 마셨다. 카지와 엘리나가 함께 있으면 술을 진탕 먹고 반쯤 미친 상태에서 파리 시내에서 소리 지르게 된다. 그렇게 미친 짓을 하다가 정신 차려보니 멀찍이 떨어져 혼자 걸어가는 그가 보였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고르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누가 되었든 혼자 떨어져서 걷는 건 보기 싫다. 그는 실없는 소리를 몇 마디 했다. 자기가 이 그룹에서 가장 키가 크다고 했다. 내가 제일 작다고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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