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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신호등 2분

by 매실 Jan 30. 2023

짧으면 1분, 아무리 오래 걸려도 2분은 넘지 않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2분이 이렇게 길었나. 시계를 보니 9시 21분. 온몸에 힘을 잔뜩 준 채로 까치발을 들었다 내려놨다 콩콩, 몸을 좌우로 왔다 갔다 다시 콩콩. 그렇게 움츠린 몸을 풀어내고 시간을 보니 여전히 9시 21분이었다. 혹시 시계가 잘못됐나. 뭐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때 9시 22분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초등학교 때가 생각났다. '다들 눈을 감아보세요. 1분이 지났다고 생각할 때쯤 손을 들고 눈을 떠주세요. 1분을 가장 비슷하게 맞춘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에요.'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육십이 됐을 때 손을 들었다. 눈을 뜨니 시간은 49초. 숫자를 잘못 센 건 아닌데 할 때쯤 1분이 됐다. 선생님은 1분을 맞춘 학생의 이름을 말하며 박수를 쳐주셨다. '생각보다 1분이 길죠?' 그다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속도의 체감이 다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때의 추억이 스쳐가고 나서야 신호등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을 건넜다.


 길을 걷다 신발끈이 풀리면 신발끈을 묶을 만한 곳을 찾았다. 그렇게 찾다가 멈추어 선 곳은 매번 신호등 앞. 신발끈뿐만 아니라 걸으면서 하기 불편한 것들, 이를테면 거울을 보거나 핸드폰 답장하는 것도 주로 신호등 앞에서 하곤 했다. 물론 신호등 앞에 도착한 순간 초록불이 켜질 때도 있다. 그럴 땐 운이 좋다며 길을 건넜다. 다음 신호등에서 신발끈을 묶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걸으면 신호를 놓칠 것 같고 그렇다고 뛰자니 귀찮아서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채로 신호를 건너다가 깜빡이는 불을 보며 뛸 때도 있다. 그럴 땐 묘한 성취감을 느낀다. 달리기 별거 없네. 내 100미터 달리기 기록이 18초였던가. 청소년 시절엔 운동장 뛰기, 100미터 뛰기, 장거리 뛰기도 했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은 달리기 할 일이 많지 않다. 주로 지하철과 버스,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뛸 때뿐이다.


 누구나 그런 적이 있지 않을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무조건 흰색만 밟아야 해, 안 그럼 죽는 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건넜던 적. 쑥스럽지만 나는 여전히 횡단보도를 건널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주문처럼 외우던 말이라 괜히 검은색을 밟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뛰면서 내 옆을 지나갔다. 횡단보도의 흰색 검은색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건너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은행, 요가학원, 사무실, 논술학원. 논술학원에 가는 거겠지. 괜히 아이들의 동심을 걱정한다. 횡단보도 건널 때의 재미도 못 느끼고 사는 요즘 애들, 참 안타깝다고. 아이들 뒷모습에 쓸데없는 걱정과 안쓰러운 눈빛을 던지며 길을 건넌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보면, 건너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띌 때가 있다. 휠체어에 탄 딸과 그 휠체어를 잡고 있는 어머니,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연인, 핸드폰 들여다보는 사람, 버스를 타려고 저 멀리서 뛰어오는 사람, 맞은편 가게에서 커피 사서 나오는 사람. 평소 지나치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평온함을 느낀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건, 봄이 왔다는 신호다. 매서운 찬바람 대신 코를 간지럽히는 봄냄새가 솔솔 풍겨 괜히 여유로워진다. 마음이 급할 땐 신호를 기다리는 2분이 길게 느껴지는데, 여유로울 땐 이 시간 자체가 즐거움이다. 이런 게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의 틈이 아닐까.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잠깐 멈출 수 있는 시간. 오늘도 2분을 아낌없이 즐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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