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생겼다
남자친구가 생겼다.
여러 번의 소개팅을 했고, 소개팅이 성사되지 않을 때마다 현타가 왔다. 난 단지 내 편을 찾고 싶은 것뿐인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결혼 가치관이 다르시네요 죄송합니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너무 부담스러워요 죄송합니다.',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이 들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나의 거절과 상대의 거절을 주고받다 보니, 소개팅을 꼭 해야 하나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굳이 현타를 받아가면서까지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야 할까. 하지만 소개팅보다 더 어려운 건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정적인 활동을 하는 내 취미는 주로 여성분들이 많았다. 또한, 누군가를 만난다는 생각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기에 자연스럽게 만난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맘때쯤 소개팅이 들어왔다. 아, 그래도 내 마음만 열려 있다면 언제든 소개팅이 들어오는구나. 다행이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받기로 했다. 연락의 정도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만나기 전부터 틈틈이 연락을 이어갔다. 그렇게 이틀 뒤 그 사람을 만났다. 연락만으로도 잘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라고 다짐했는데… 그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뚝뚝 끊겼고, 배려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투가 무심한 듯 날카롭기까지 했다. 다시 만나자는 그의 에프터를 거절했다. 연락하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허무함,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공허함이 찾아왔다. 이젠 소개팅이 무섭기도 했다. 이렇게 계속 허무함이 반복될 바에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결혼은 하고 싶은 걸? 두 가지의 마음이 계속 부딪혔고 결국 마지막 소개팅을 하기로 결심했다.
30대 중반이 되니, 질문이 달라졌다. '결혼 생각은 있으신가요? 자녀 계획은요?' 이름 정도만 공유한 사이인데, 이렇게 결혼 얘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신선했고 씁쓸했다. 더 이상 좋은 감정 하나만으로 시작하기 어려운 나이라는 걸 실감했달까. 어쩌다 보니, 시간 낭비할 나이가 아니었다. 단순히 좋아해서 만났던 어릴 때와 달리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굳이 맞춰가야 하나, 대부분 사람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본인과 어울리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당연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다만 씁쓸할 뿐. 연애도 결혼도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노력 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나와 맞는 사람이 없을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그렇게 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마무리하곤 했다.
반면 지금의 남자친구는 내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저도요, 저와 비슷한 결이시네요,라고 말했다. 처음엔 소개팅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적당히 리액션을 해준다고. 그래서 그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어떤 점을 좋게 봤고 나의 어떤 점과 비슷한지 말이다.
대화를 나눌수록 내 의심은 걷어졌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장난을 잘 받아줬으며 선을 넘지 않았다. 센스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난 당일에 다음 만날 장소를 예약하는 그의 적극적인 행동에도 마음이 갔다. 조심스러운 나이라고 생각하여 다들 선을 그을 때,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있었겠지만) 그는 현재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순수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 있었구나.
그렇게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날은 양산을 쓰고 있어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더웠다. 걸음이 빠른 탓에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다. 약속 장소에 다가올 때쯤 발걸음을 천천히 걸으며 땀을 식히려 했다. 그때 약속 장소인, 파스타집 앞에 서있는 그가 보였다. 그도 멀리서 나를 발견했다. 너무 멀리 있었기에 인사를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애꿎은 양산만 오랫동안 접었다. 그는 더운 날씨라 안에서 기다릴 법도 한데, 같이 들어가기 위해 밖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긴장한 나와 달리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자리에 앉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여기 오고 싶었다, 인테리어가 예쁘다 등등의 말을 꺼냈다. 그런 나의 말에 그도 같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의 말에 공감해 줬다.
적극적인 사람이라 긴장도 없는 건가 생각할 때쯤, 그의 긴장을 발견했다. 그는 파스타를 먹기 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파스타를 한 입에 먹었다. 마치 먹으면 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먹는 듯한 상황 같았다. 몇 입 먹지 않은 상태였기에 자연스럽게 그가 긴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적극적인 태도에 바람기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계산 없이 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밖으로 파란 하늘에 몽글몽글한 구름이 보였다. 드라이브를 가고 싶어졌다. 나의 즉흥적인 말에 그는 눈을 반짝이며 드라이브를 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을왕리에 갔다. 소요 시간은 약 35분. 가는 길 내내 할 말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갔다. 가끔 찾아오는 정적에도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며 내 장점을 곁들여 말해줬다. 칭찬이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덕분에 대화를 나누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나를 알아보는 듯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을 마주한 순간의 내 기분도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꾸밈없이 솔직한 그 사람의 태도도, 투명한 시선으로 내가 비치는 느낌도 다 좋았다. 그래서 신이 났던 걸까. 나도 모르게 아이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는 내가 말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노력했다기보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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