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의 소개팅 끝에>이어서...
좀 더 놀자고 붙잡고 싶다가도 이미 동네까지 왔기에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트 앞에 내려달라고 말한 뒤 장 보러 식품 코너로 걸어갔다. 그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거울을 떨어뜨리셨어요. 지금 찾아가실래요? 아니면 다음에...'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둔 내 거울이 언제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그의 말에 “다음에 주세요.”라고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니 그 물음이 에프터를 신청해도 되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집에 도착한 그는 내가 떨어뜨린 하트거울이 자기 손에 있다고 말했다. 그저 내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뿐인데도 거기서 설렘을 느끼는 듯했다. 걷다가 발을 접질리거나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는 나를 보면서 빈틈이 보이는데, 이 행동이 모두 귀엽게 느껴진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꺼냈다. 혼자서도 척척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았다.
그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그런 말들이 내 마음을 조금씩 열리게 했고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며 나 역시 그렇게 해 주고 싶기도 했다. 쟤가 저러니까, 나도 이렇게 해야지 하는 계산적인 관계가 아니라, 저 사람의 칭찬이 나를 기분 좋게 하니까 나도 칭찬으로 그를 기분 좋게 하고 싶었달까. 칭찬하는 나 자신이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달라지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때마침 축제 기간과 겹쳐 공연을 보기로 계획했다. 이번 만남 역시 긴장됐다. 머리스타일을 점검하고 화장이 잘 됐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공연을 보기 전에 내가 자주 가던 삼겹살집으로 갔다. 테이블이 몇 개 남지 않았다. 우린 창가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고기와 맥주를 주문했다. 이 긴장감을 풀기 위해 술에 의지하고 싶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그는 좀 더 또렷해진 눈으로 나를 봤다. 그 눈빛에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서 괜히 익지 않은 고기를 뒤집었다. 그는 내게서 집게를 가져갔고 고기를 잘 굽는다고 말했다. 우리 사이에 조용한 공기가 흐를 때면, 그는 저 궁금한 게 있어요,라며 말을 꺼냈다. 그 질문이 뭔지 알지 못했지만, 가슴이 쿵했다. 어떤 질문을 할지 모르는데 내게 궁금한 점이 있다는 게 좋기도 하면서 긴장되기도 했다. 지금 딱 좋은데, 맞지 않은 부분을 알게 되면 어떡하지.
내 생각과 다르게 그는 조심스럽게 내게 결혼과 아이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정말 이전 소개팅과는 다른 깊이 있는 질문이었다. 결혼생각이 없었다가 마지막 연애를 끝으로 결혼생각이 생겼다고 답했다. 친구들 아기와 유튜버 태하를 보면서 아기를 낳고 싶다고도. 물론 내 아이가 잘 자랄지는 미지수이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힘들어 보이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나는 그저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본인도 그렇다며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다. 대화를 할수록 가벼운 장난뿐만 아니라 진지한 대화도 이어가고 싶어졌다. 내 가치관이 좀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잘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진심을 계속 말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우린 재즈바로 갔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자리에 사람이 많았다. 다행히 한 자리가 남아 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음악이 커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꼬시는 듯한 제시처를 하는 내가 낯간지러웠다. 그럼에도 스멀스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아직 풋풋할 수 있는 나이인 건가. 설렘은 역시 나이와 상관없는 거구나.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쳤고 그럴 때마다 서로를 보며 이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음악도 자유로웠지만, 술까지 마셨기에 가슴이 자꾸 널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더 설레도 될 것 같았다.
바를 정면으로 공연은 왼쪽에서 진행되고 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뒤통수를 보았다. 그는 공연에 집중하는 듯하지만, 생각이 많아 보였다. 공연을 봐야 할까, 대화를 나눠야 할까 고민하는 느낌이랄까. 아니, 어쩌면 나를 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정을 내렸는지 내쪽으로 몸을 돌리고 나와 만나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제는 누구를 만날 때 더 신중해진다. 실패보다 행복의 끝을 알고 싶다. 그렇기에 자꾸만 확인하고 싶다. 확신을 주고 있지만, 조금 더 확실한 확신을 말이다. 그는 본인의 가치관, 연애 가치관, 결혼가치관이었는데 자신이 결이 닮아있다고 말했다. 더 깊게 알아가려면 만나야 가능하지 않냐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말할 때마다 나의 장점을 발견하는 걸 보면서 그와 함께 라면 꾸밈없이 내가 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있게 옆에 있어줄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그렇게 우린, 3번째 만났을 때 1일이 되었다.
재즈바에 나와서 남자친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매번 적극적이었던 그는 수줍게 내 손을 잡으면서 행복하다,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 같았다. 작은 것에도 고마움을 아는 사람일 수 있겠구나. 내가 의심이 많은 편이라 이 표현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건지 진짜 이 순간에 대한 솔직한 표현인지는 확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을 거짓 없이 표현하는 사람처럼 보였기에 그 말을 온전히 믿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