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집에 있는 내 모습에서 불안이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매일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왜 불안해 보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남자친구와의 관계와 시간에 겁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얼마 전에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봤다. 솔직히 재미없었지만, 하나는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은 자고 일어나면 교통사고가 나기 전 기억으로 돌아간다. 즉 어제 있었던 하루를 기억하지 못한 채, 기억하고 싶어도 잊어야만 하는 병을 안고 살아간다. 나와 다르지만, 비슷한 결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모든 것이 한때가 되어 사라지는 걸 두려워한다. 지금 행복하면 곧 행복이 무너질 것만 같고,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조만간 끝나버릴 것 같아 미리 겁을 냈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서 나 혼자 그 자리에 남아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같은 감정을 더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잊히는 게 무서웠다. 물론 한때이기 때문에 애틋한 것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애틋함이 그리움으로 변해버리는 게 싫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놓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손에 쥐가 나도록 붙잡고 있었던 셈이다. 다들 내일을 생각할 때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에겐 전 현재가 중요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현재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건 어쩌면 내 바람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때론 놓을 줄도 알아야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잔나비 <슬픔이여 안녕>을 들었을 때 슬펐던 걸까. 잃어버린 것들은 잃어버린 그 자리에 두고 가끔 뒤 돌아보면 슬픔 아는 빛으로 피어난다는 가사가. 아직 나는 무언가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그때쯤 릴스에서 이런 문구를 보여줬다.
사랑하는 게 무서워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사랑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할까 봐 무서운가 봐.
사랑하면 자꾸 원하게 되니까.
이 문장이 오래 머물렀다. 나는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지만, 상대방과 나와 사랑의 크기가 같지 않아 훗날 상처받을 나를 걱정하는 것 같다. 혼자 남겨진 게 무서웠던 것 같다. 그러니 상처받을 타이밍이 보이면 밀어내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밀어내려고, 그러면서도 내 곁에 머물러주길 바랐다. 또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라 내 바람이 상대에게 불편을 줄까 봐 자연스럽게 눈치를 살폈던 것 같다. 불안함이 여기서 왔구나 싶었다.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봐. 또 나 혼자 오버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 혹여나 같은 마음이 아니라 관계가 끝이 나면 나와 맞지 않구나 하고 끝어내면 되는데, 그 잘못을 내 탓으로 돌렸다. 내가 부족한 것 같아서.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걸까. 아니면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상대가 아닌 나에게 관심을 돌려 성장하려 했던 걸까. 그게 어떤 이유든 결국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걸 보고 막막했다.
마침 내 생일이라 남자친구랑 같이 커플 심리 체험을 했다. '나'와 '함께 있는 나'에게 집중해 보는 여러 콘텐츠가 있었고, 그중 내 고민에 집중하여 전달받은 편지가 있었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니 좀 더 명확해졌다.
쉽게 만족하지 않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고른 당신은 혹시 저와 비슷하게, 결과로 주어진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았을까요? 맞는 말이이지만 뻔해서 재미가 없고,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고, 좋은 것인 줄 알아도 갖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정말 답답한 것은,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나조차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만족하고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쉽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것들을 기억하는 능력이 꽤 좋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것들이 생기면 그것을 자주 떠올리고 기억해서 소중히 모아두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해집니다.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당신만의 수집품들이 보일 거예요. 비록 아직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해서 뒤엉킨 채, 적절한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버겁게 느껴지더라도 자신을 믿고 소중히 간직해 보세요. 언젠가 꽤 마음에 드는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예요. 당신은 당신답게, 저는 저답게 언젠가 각자 멋진 모습으로 어디선가 만나게 되길 바라요. 늘 나만의 것을 찾는 당신을 응원하며...
내가 나를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나아가질 못했구나.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척했구나. 그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거다. 근데 그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르겠다. 이미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되는데, 그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랑을 하되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그에게서 걱정하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내게 잘못된 걸 찾는 게 문제이지. 비록 그 잘못이 상대에게 있어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자꾸 자유를 찾으려고 하는 걸까. 이런 눈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하지만 그러지 못한 현실에 자유를 갈망만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지만, 말만 할 뿐이지 과감하게 도전한 적은 없다. 그 과감이라는 말이 전재산을 탕신하면서 노는 걸 말하진 않는다. 돈을 주고 배우는 것도 도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뭐랄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똑같은 결혼식이 아닌 나만의 결혼식이라든가,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사람들을 모아 소소한 파티를 하는 것 같은 거 말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나도 할 수 있는데, 하기 전에 내게 관심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쓸데없는 고민이 앞서는 것 같다. 너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거 같은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어쩌나~ 하는 시선들에 걱정이 앞섰다. 또, 나도 함께 하고 싶은데 바빠와 같은 거절을 받다 보면 내가 또 실망할까 봐 그래서 좀 더 나중에, 나중에를 하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어릴 때처럼 손으로 초대장을 써서 친구들을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싶고, 즉흥적인 감정에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 내가 아닌 나로 며칠만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마음은 이런데 실천하지 못하고 기대감만 커져서는 자꾸만 답답하고 실망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만족하지 못하는 건 내가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에 오는 걸 수도 있고, 그렇다 보니 현재의 행복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떠나갈까 봐 미리 겁을 내는 것 같다. 어차피 나는 못할 거야, 어차피 내가 이렇게 해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을 거야, 어차피 내 마음과 같은 사람은 없을 거야. 이런 마음이 자꾸만 나아가려는 내 발걸음을 붙잡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밀어내는 마음이 오히려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만족을 하지 못하고 현재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괜찮을까?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소심해서 선뜻 나서질 못하는 사람들.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와 함께 용기를 내어 잠시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보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걸까. 그렇게 시도하고 나면 별거 아니었잖아, 하면서 모든 순간을 만족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하고 누군가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잔나비 <외딴섬 로맨틱>의 기꺼이 함께 가줄게,라는 말에 울컥했던 걸까. 이쯤에서 잔나비 찬양은 이쯤에서 멈추고. 다시 생각을 정리하자면, 내가 원하는 걸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남자친구 혹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누구든 그들과 용기를 내어 나아가고 싶다. 나도 내 인생을 좀 만족하고 가볍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