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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Aug 12. 2019

집에 가는 게 무서워요.

집에 가던 여성을 뒤 따라오던 남성이 있었다. 여성이 집 문을 닫자 뒤 따라오던 남성은 그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CCTV에 찍힌 남성은 잡힐 것 같은 불안감에 3일 만에 자수했다. 원룸에 살고 있던 때라 그 여성에게 감정 이입돼서 무서워졌다. 잡혔다는 소식을 들어도 문을 3단으로 잠그고, 가던 길을 계속 뒤돌아보며 집에 가곤 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거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TV를 조용히 누르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노심초사하며 귀를 기울였다. 집에 있어도 편안하기보다 무서움이 클 때가 많다. 내 앞에 가던 사람도 내 발걸음 소리에 뒤 돌아보는 걸 보면 나와 같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 사건을 뉴스로 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내 친구에게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같이 살고 있는 친구는 방송사에서 근무하고 있어, 새벽 출근이 잦다. 새벽 4시 30분이 좀 넘어서 출근한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길 모퉁이에서 담배 피우고 있던 사람이 걸어가고 있던 친구를 향해 뛰어와 몸을 만졌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지금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다고. 그 말을 듣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친구 시점


평소처럼 출근하던 새벽 4시, 골목에서 담배 피우던 한 남성이 있었다.

괜한 무서움에 핸드폰을 꽉 지고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뭔가 꾀림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자 그 남성이 바로 내 뒤에 서있었다. 저 멀리서 내가 있는 곳까지 뛰어왔던 것. 갑자기 온몸이 소름 끼쳤다.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바닥에 넘어져있었다. 날 보던 그 얼굴에 놀라 넘어진 것이었는지, 날 만지던 그 남성의 손에 놀라 넘어진 건지 순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넘어져 있었다. 더 무서웠던 건 넘어진 나를 가만히 서서 본 그 남성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있는 힘껏 욕했다. "이 씨발새끼가!!" 몸은 얼었지만 있는 힘껏 소리 질렸다. 그 남성은 나를 그냥 쳐다볼 뿐 도망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때 까만 차 한 대가 지나갔다. 이때다 싶어 차를 향해 "사람 살려"라고 외쳤다. 아까보다 몇 배로 더 큰 목소리로. 남성은 그제야 도망갔다.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그 남성은 내가 따라오지 않는 걸 보고 터덜터덜 걸어갔고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남성 뒷모습만 보고 있다는 게 너무 분했다.



몇 분 후 경찰차가 지나갔다.

길에 덩그러니 서있는 나를 지나쳤다. 다시 올 줄 알았던 경찰차는 오지 않았다. 112에 전화해서 피해 장소에 방치되어 있음을 알렸다. 혼자서 그 자리에 서있는 건 지금도 상상하고 싶지 않다. 너무 무서웠다. 그래도 그 사람만 잡는다면 그때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다. 몇 분 뒤 도착한 경찰에게 남자가 도망한 방향과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순찰하는 동안 범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 남자 얼굴을 기억하고 있고, CCTV도 있었기에 곧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침 9시가 조금 지나서 내 사건이 여성청소년과에 배당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 문자가 끝이었다. 다음날이 되어도 범인을 잡고 있는지, 순찰을 강화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출퇴근할 때마다 그 길을 가야 한다. 택시나 버스를 타더라도 그 길을 지나간다.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한데, 지금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게 더 답답했다. 불안한 마음에 경찰서에 전화하니 수사관이 휴무라고 했다.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담당 수사관이 출근한 뒤에야 진행사항을 알 수 없었다. 즉, 휴가가 끝나기 전까지 그 일에 대해서 조사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된다.


지금쯤 그 남성은 뭐 하고 있을까. 다른 범행을 노리고 있을까? 평소처럼 길 골목에서 담배 피우며 지나가는 여성들을 보고 있을까? 그러다 또 그 남성을 만나면 어떡하지? 온갖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담당 경찰이 휴가가 끝나고 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기다리는 것 밖엔.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에야 범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내게 뛰어왔다가 도망가는 CCTV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도 구별하기 힘든 한 장면이었다. 동네 방범용 CCTV는 시간마다 회전하며 녹화하기 때문에 하필 그 범인 얼굴이 찍히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2주가 지난 지금도 그 도망가는 장면 외에는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뛰지 않고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 남성의 걸음이 이해됐다. 잡히지 않을 거란 걸 알았던 거겠지. 시간이 지났고, 그 남성이 걸어간 길 근처 CCTV에서도 찾을 수 없어 더욱 잡기 어려워졌다. 이렇게 잊힐까 무섭다.


경찰은 불안하면 신변보호 신청을 해주겠다고 했다.

언제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바로 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불안했지만 거절했다. 피해 당일에 바로 신고해도 못 잡았던 그 범인을, 바로 신고할 수 있는 팔찌를 하고 있다고 해서 내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이젠 내 사건이 경찰을 귀찮게 만드는 건 아닌가 생각되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을 걸 인정하고 다른 일을 하라고 말해야 하나,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해야 하나. 또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없던 것처럼 잊은 채 살아야 하나.


매일 성범죄 기사를 접하는 것처럼 성범죄자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골목에서 음란행위를 하던 아저씨들은 횟수를 세기 의미 없을 만큼 많이 만났다. 명찰 달린 교복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버스에서 내 엉덩이를 만졌던 고등학생, 버스에서 내 허벅지를 만졌던 대학생, 할아버지까지 많은 성범죄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잦은 횟수에 무뎌진 듯 그저 재수 없는 일 정도로 여기며 살았다. 이번 일도 그래야 하는 걸까.


나는 내가 아닌 그 남성이 불안했으면 좋겠다. 자기가 한 일이 잘못된 일임을 깨닫고 자수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 정말 잡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했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변에 알려질까 노심초사했으면 좋겠다. 순찰차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랐으면 좋겠다. 불안에 떨며 집 밖에 나오지 못했으면 좋겠다. 불안에 못 이겨 매일 괴로워했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게 이것뿐이라는 게 너무 화난다. 가장 할 수 있는 일이 그 사람들의 불행을 바라는 거뿐이라니.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했다. 몇 명은 나를 걱정했고, 몇 명은 택시 타고 출근하지 왜 걸어서 왔냐며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 말에 의기소침해졌다. 택시 탔으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길을 걷지 않았더라도 다른 길에서는 안전했을까? 안전하게 출퇴근하고 싶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범인이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친구 얘기를 들으면 과연 잡을 수 있을까?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경찰과 통화하고 나면 한숨소리가 더 커진 친구를 보면. 친구는 그 남성이 잡히길 바라는 동시에 잡히지 않을 거란 걸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넘기기 싫어서 뭐라도 하고 싶어 했다. 판에 올릴지, 기사를 써서 투고할지. 뭘 할지 생각하다가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는 브런치를 선택했다. 이 글을 쓴다고 해서 범인이 잡힐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일들이 그냥 넘기는 사건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신속하고 명확하게 해결해줬으면 좋겠다. 집에 가는 길이 무섭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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