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벽 발자국에 내가 놓친 아파트

복도 갤러리

by 매실

흰 벽 발자국에 내가 놓친 아파트

복도 갤러리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엄마는 말했다. “예전엔 문도 잠그지 않고 동네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냈는데” 목소리엔 아쉬움이 있었다. 엄마의 말은 과거형이다.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을 만나도 지나친다. 인사 정도 할 수 있을 텐데. 상대방을 알아야지만 인사할 수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너무 자주 마주친 아저씨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고 아저씨는 나보고 ‘나 알아? 왜 인사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당황했다. 그렇게 같은 층에 살지만 서로 모른 채 살아간다. 아파트 복도에서 1층 아파트 입구 계단을 보면 많은 대화를 들을 수 있다. ‘다녀올게’ ‘우산 좀 던져줘’ 이 대화만 보면 분명 사람 사는 공간인데 사람 사는 공간보다 잠시 지나가는 공간처럼 느껴지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내가 놓친 아파트

라디오에서 100m 산책 방법을 소개했다. 먼 곳을 걷기보다 100m 앞까지만 걸으며 자세히 보는 산책. 오늘 이 꽃은 이렇게 피었고, 경비아저씨가 이발했으며, 방금 누군가가 치킨을 시켰구나 하는. 이 공간이 지금보다 더 사람 사는 공간이길 바랐다. 그래서 100m 안 아파트를 산책하며 사진 찍고 복도에 사진전을 진행하려 한다. 층마다 문 앞에 사진을 붙였다. 문을 열었을 때 사진을 본다면 어떤 반응일까. 그 전엔 흰 벽에 발로 찬 여러 발자국이 있었는데 이젠 우리 아파트에서 자라고 있는 꽃과 나무들 사진이 보인다면.


Q: 어떻게 복도 갤러리를 생각했어요?


요즘 제가 있을 공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요. 제 취향이 담긴 공간을 만들어가고 그 주변에도 그런 곳이었으면 했어요.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이 싫은 건 아니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아요. 나무가 좀 더 심겨있으면 좋겠고 벽에 발자국을 그려내지 않았으면 좋겠고. 제 공간을 만들려면 제 주변도 중요하게 여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여백 많은 복도 벽이 보였고 이곳에 조금이라도 머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Q: 몰래 시작했다고요?


전에 깨진 시멘트 바닥에서 꽃을 심어놓고 도망치는 프로젝트를 본 적 있어요. 프로젝트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멋있었어요. 보통 자신을 밝히면서 기특한 일을 했다고 칭찬받길 원하지만 몰래 그 일을 하면서 주변이 바뀌길 바랐잖아요. 저도 이와 같은 시작이에요. 누가 했느냐보다 사진을 통해 사람들의 시각이 바뀌길 바랐어요. 이를 시작으로 아파트 안에서 플리마켓도 해보고 싶고. 다양한 걸 해 보고 싶어요.


Q: 본인을 통해 세상이 바뀌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저로 인해 도움되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얼마 전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영화를 봤어요. 항상 사랑받기 원했고 이로 인해 비극적일 수 있는 일생을 살지만 그녀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줬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했어요.


인간의 가치란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뭘 해줬느냐에서 오는 것 같아


저도 누군가에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열심히 사는 제 모습을 보며 '저런 삶도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했으면 해요. 글 쓰고 사진 찍는 일도 이와 같은 이유예요. 제가 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이 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 나이대라서 느끼는 감정인 것 같아요. 불안 같은. 이를 글로 표현하면서 제 자신도 위로하고 누군가가 공감해줬으면 해요.


Q: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저 역시 이 동네를 집에 가는 길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래도 애정을 갖고 산책한다면 예쁜 부분도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죠. 그 생각으로 100m 산책을 하는데 화단에는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고 놀이터나 조금 높은 턱에는 다 00 금지 판넬이 붙어있었어요. 뭔가 다 안 될 것만 같은 이 아파트 주변에서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을 수 있을지 걱정됐어요. 그 생각 중, 나무 끝에 있는 봉오리가 보였어요. 그 뒤에는 1층 베란다에서 키운 꽃이 있었고요. 그 꽃은 시들었고 앞에 있는 나무는 봄을 찾고 있었죠. 사람이 키운 식물은 시들었고 자연이 키운 식물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여기에도 생명이 있다고 느꼈죠. 더 자세히 보고, 어떤 층에서 보느냐에 따라 내가 찾고자 하는 모습을 담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삶이 풍요로워지는 시간


Q: 앞으로도 복도 갤러리를 할 건가요?


잘 모르겠어요. 우선 반응을 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응이 좋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있고. 정말 플리마켓 기획안을 제출하면서 더 활동적인 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Q: 이와 관련해서 고민이 있나요?


고민은 많지만 한 가지만 말하자면 저를 들어내는 일이에요. 저는 복도 갤러리와 같은 활동적인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좋아해요. 하지만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요. 전에 동아리 형식으로 사람을 모은 적은 있지만, 진심이라기보다 경력(스펙)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사람을 모으지 않고 혼자 해보고 싶어요. 그 모습을 보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사람이 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늘 그렇듯 혼자 하는 건 너무 어려워요. 더 당당하고 뻔뻔하게 진행하기엔 제 성격이 소심하기도 하고. 한다면 구체적인 안을 만들 수 있지만, 참여율이 저조했을 때 제가 상처 받는 게 걱정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먹고사는 일이 바빴어요. 대학교 때에는 과제하느라, 사회생활할 땐 일에 적응하느라. 그래서 중요한 일은 항상 뒷전이었어요. 밥은 대충 먹고, 집은 저는 공간이었죠. 바쁘지만 늘 허전했어요. 공허했고. 생각해보니 커피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주지 않았고, 제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었더라고요. 그래서 요샌 제 공간을 제 취향에 맞게 꾸미거나, 아침에 일어나 차 한 잔 마시며 여유를 찾고 있어요. 제 삶이 더 풍족해지는 기분이에요. 바쁜 일상 속에서 삶이 풍족해지는 여유로운 시간은 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저도 그렇게 살 거고요.



월간심플 2월 '공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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