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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Nov 29. 2021

술을 마셨더니 세상이 돌고 있었다

술을 마셨다. 지구가 돌고 세상이 돌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떠도 세상은 여전히 내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렇게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나 하나쯤 미친다고 큰일이야 있겠어라며 빙글 속 세상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졌다. 찬 공기도 술잔을 부딪히는 사람도 그날의 분위기도 너무 좋아서 흘러가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술을 마셨다. 갑자기 뛰고 갑자기 소리치고 갑자기 웃으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젓가락 하나 떨어지는 것조차 웃겨서 배가 아팠다. 그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웃어본 적도, 이렇게 취해본 적도.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취할 때까지 마실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학생 신분에서 떠났으니 조심성 있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을 걱정해야 했고, 다음날 미팅을 준비해야 했고, 다음날 회의를 진행해야 했으니. 오랜만에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난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아무렴 어때. 될 대로 되라지'라고 깡이 넘치던 그때를. 다음날 수업이 어떻게 되든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던 그때를. 대충 씻고 모자를 눌러쓰고 지각하지 않으려 뛰던 그때를.


술이 달았다. 현실이 쓴맛과 비례하여 현실이 쓸수록 술은 더 달았다.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얻고 술의 힘을 빌려 내 나약함의 끝을 봤다. 술에게 위로받았다. 최대한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내 초라함을 들키면서 무너지는 나를 실시간으로 지켜봐도 괜찮아 미친 세상이잖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술이 술을 마셨다. 여기서 더 마시면 안 된다고 말하는 뇌를 무시하고 술잔을 또 들었다. '진짜 안돼 안된다고'라고 말하는 이성적인 소리를 무시하고 술잔을 부딪히며 웃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쓴맛을 잊을 수 있었고, 오직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술이 맛있었다. 그렇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시다가 다음날 술에 깨어 일어날 때 현타가 왔다. 어제의 나도..내가 맞나. 미쳤었구나. 감추고 있던 모습을 보이는 건 외로움일까 그리움일까. 잠깐 생각에 젖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이미 지나간 일인 거 아무렴 어때. 오늘 할 일이나 신경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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