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책

by 최다혜

큰 기대 없이 달린 산책로 끝에 추암 해변을 만났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예측할 수 없던 행복이었기에, 감격이 어마어마했다.


도착 30분 전까지만 해도 별 것 없는 화요일 아침이었다. 달려드는 파리를 손으로 휘저으며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함에 툭툭 털어 넣고 있었다. 그런데 타임머신을 탄 것도 아닌데 내 몸은 순식간에 휴가를 맞이 해버린 거다.


바퀴 두 개 달린 자전거, 그리고 거실에서도 내려다보이는 전천 산책로는 특별하지 않은 물건과 장소였다. 달라진 건 단 하나, 등원 길에 귀동냥으로 들은 말 한마디였다.


"전천 놀이터 쪽으로 쭉 가면 추암 해변까지 이어져."


산책로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추암 해변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이웃 언니의 말을 이정표로 삼았다. 두 다리로 페달을 쉼 없이 구르다 보면, 굉장한 무언가가 분명히 나타난다는 확신. 확신이 없었다면 해변까지 오는 길에 만난 하수종말처리장과 화력발전소에서 핸들을 꺾었을 거다. 회색 콘크리트와 쇠파이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풍경 따위에 귀한 운동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 곧장 집으로 와버렸을 거다.


아무도 나에게 추암 해변까지 이르는 자전거길을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이토록 마법 같이 아름다운 추암을 볼 수 없었을 거다. 먼저 길을 가본 사람이 알려주는 달콤한 결과는, 뒤따르는 사람에게 힘이 되었다.


뒤따르는 사람 또한 앞선 사람의 말을 믿고 핸들을 꽉 쥐고 페달을 밟아야 한다.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우직함이 필요하다. 이어지는 실천 없이 흘려듣기만 하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허공에 떠도는 유언비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정표와 실천. 두 가지를 모두 갖췄을 때, 추암해변도, 인생의 봄볕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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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겨 온 책을 꺼냈다. 이웃 언니가 가르쳐 준 '추암 자전거길'이 짧은 일상의 이정표였다면, 책은 긴 삶의 이정표가 된다. 그러니 어딜 가도 책을 챙겨가지 않을 수 없다. 책이 주는 울림을 알고 나면, 자전거길 내내 짊어질 책무게 따위는 손해도 아니다.


좋은 말을 읽고 나면, 몸으로 움직여야 진정한 책의 재미다. 단 한 권의 책은 위험하지만, 여러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삶의 이정표가 내면화된다. 책을 읽어 알게 된 대로 살아본다.


육아의 고충을 듣기만 하면 아득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막상 아이를 길러보면 이것도 다 사람 사는 일이다. 지레 겁먹은 것만큼 죽을 지경은 아니다. 책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감히 실천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들도 막상 움직여보면 해볼 만할 때가 많다.


단출한 살림도, 절약하는 나날도, 아이들을 자연으로 데려나가는 노력도, 매일 책 읽고 글 쓰는 습관도, 도서관 나들이하는 발걸음까지. 작지만 위대한 습관들은 모두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책이 내게 속삭이는 이정표들이다.


책이 들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적은 소유로 더 행복할 수 있고, 아이들의 시냅스는 더욱 풍성해지며, 평생을 살아갈 단단하고 행복한 추억 보따리를 두툼하게 불리게 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도 책을 읽지 않아 몰랐을 때보다, 훨씬 내면은 자유롭고 자존감은 두터워졌다.


앞으로 책을 더 읽어서 알게 될 정교한 이정표가 궁금하다. 이러니 도무지 책 없이는 살 자신이 없다. 무용(無用)한 재미로 책을 읽으라던데, 도무지 발버둥 쳐도 쓸모 투성이다. 언제나 기대 이상이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읽는다. 그리고 오랜만에 예전의 나를 받쳐주던 이정표들을 꺼내어본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하루를 잘 살아내야겠다는 용기를 얻는다.


먼저 간 길을 한 권의 책으로 알려주는 작가님들에게 무한한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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