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가 재벌이었다면, 나는 재벌 2세로서 기꺼이 무급 육아휴직을 했을 거다. 돈 안 줘도 할 일들이 의미만 있다면 움직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벌 2세는 돈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완전한 경제적 자유인이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재벌이 아니다. 그러니 경제적 '자유'까지는 어려워도, 적어도 경제적 '자립'인은 된다. 59㎡ 작은 복도식 아파트인 우리 집이 보증금 6천4백82만 원에 월 임대료 0원. 올해 전세로 계약을 갱신하면서 그나마 내던 월세 63500원마저도 삭감됐다. 삶의 유지비만 줄어도, 경제적 자립이 됐다.
재벌 2세가 아니지만, 어설픈 경제적 자립인 정도는 되기에 나는 기꺼이 무급 육아휴직을 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될지언정, 아이와 함께 하기를 택했다. 같은 초등학교 학군 안에, 40평대 2억 3천5백만 원짜리 아파트가 떡하니 서 있어도 우리 집을 기꺼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뉴스에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명단에 사는 집이 쓰여 있어서,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상처 받은 적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간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 아파트 브랜드나 우리 아파트 브랜드나 도토리 키재기다. 때로는 직장 동료가 무심하게 하는 말로,
"내가 예전에 거기 살았을 때는 아주 거지처럼 살았었는데."
라고 말했었다. 말을 뱉었다가 갑자기 거지처럼 살았던 그곳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게 생각났는지 화들짝 입을 턱 막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나를 배려해줘서 민망할 정도였다. 열심히 아껴 살면 더 넓고 좋은(의 기준은 뭔지? 브랜드?)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어색하게 격려 비슷한 걸 해주긴 했다.
베란다 너머로 숨막히는 풍경 있는 이런 곳에서, 왜 거지처럼 살았다는건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폼나는 삶이나, 적어도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한 삶보다는, 자유로운 매일매일이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라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 동료가 사는 같은 브랜드 아파트에 사느라 수 억의 빚을 졌다면, 아마 나는 육아휴직을 못 했을 거다. 글쓰기 모임을 비롯해서 친한 언니들 아이들 수학 문제집 봐주기 같은 '돈 안 줘도 하는 일들' 따위는 내 선택지에 없었을 거다. 왜냐면 로또 맞은 적도 없고, 재벌 2세도 아니지 않나. 슈퍼리치가 아닌 이상, 값비싼 소유물과 돈 안 줘도 하는 일들은 공존할 수 없다. 돈에 쫓기면 한정된 시간에 내 몫을 챙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소유의 영역을 줄였다. 그리고 경험의 영역에서 산다.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일 하며, 옳다고 믿는 일을 실컷 해버린다. 아이들이 눈에 밟히면 무급 육아휴직을 하는 거고, 누군가가 행복한 모습이 좋으면 기꺼이 내 시간을 낸다. 돈이 많거나, 유명한 사람을 따르기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흠뻑 빠진다.
집, 차, 옷, 먹거리, 사교육, 액세서리나 과시용 경험들. 온갖 있어빌리티로부터 독립한 결실은 아주 달았다. (신랑과 나의 은어로는... '개꿀'이다.)
돈에만 휘둘리지 않으면, 멋대로 산다. 아이하고 낮에 책방 데이트도 하고, 글쓰기 모임 멤버들과 블로그 글을 엮어 자가 출판도 도전한다. 오늘 일도 그랬다. 나는 제7회 브런치 북 수상을 포기했다. 상금 500만 원과 영광, 그리고 작가에게 쏟아지는 화려한 마케팅을 생각하면, 기꺼이 몸을 내던져 끝까지 밀어붙였어야 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다.
수상 결격 사유. 타 사이트와 중복 게재 불가 항목을 지키지 않았다.
엄밀히 난 수상 결격자였다. 후보에는 올랐으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런치 북 <최소한의 소비>는 오마이뉴스 원고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대상 수상을 하려면, 다른 온라인 플랫폼에 썼던 글을 삭제 혹은 비공개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는 기사에 대한 저작권을 갖고 있지만, 배포권은 오마이뉴스에 있다. 마음대로 기사를 지울 수 없었다.
그간 써온 오마이뉴스 기사를 수정하는 방법도 있었다. 브런치 북과 겹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불가한 것은 아니나, 가능케 하는데 수고로워야 했다. 무엇보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 상당히 결례다. 훼손되지 않은 원고를 기사로 채택했던 건데, 기존의 기사를 대신할 새 글이 그 기준에 도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들어버린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님들께 무례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12월 19일. 수상 후보작이 되었다는 메일을 받고 손발이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녁 밥상에 올리려던 된장 미역국을 끓이는 방법조차 새하얗게 잊어버렸다. 뚝배기 뚜껑이 요란하게 들썩이는데 불린 미역을 넣질 못 했다. 결국 가스불을 꺼버렸다. 미역국을 끓이면서 수상 후보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깜냥 용량은 턱없이 모자랐다.
수상을 포기하는 전화를 드릴 때도 쉽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안방의 작은 공간에서 같은 자리를 수 십, 수 백 번 뱅글뱅글 돌았다. 그럼에도 나는 과감히 손을 털 수 밖에 없었다. 메일을 받은 지 1시간 뒤에 바로 죄송하다며, 제게 기사를 고칠 자격이 없음을, 전화로 알려 드렸다. 기본 룰을 지키지 않았던 탓에, 브런치 팀에게는 이미 민폐를 끼쳐버렸다.
솔직히 아까워 죽을 뻔했다. 그래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까닭은 우리 집이 전세 6482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생활비도 90만 원이라는 점도 '아깝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데 기여했다.
집이 작아 빚도 없고 삶의 유지비마저 소박하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넓은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영광스러운 브런치 수상 작가가 되지 못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 심지어 행복에도 큰 영향을 줄리도 없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라던데. 엄청난 상 한 번을 받지는 못 해도, 잦은 빈도로 읽고 쓰는 재미로 살 거니까.
돈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많이 벌거나', '적게 쓰거나' 둘 중 하나다. 많이 버는 건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일단 적게 쓰기만 해도 경제적 자립이 된다. 슈퍼리치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사는 건 아니다. 번 돈 보다 적게 쓰는 삶, 그럼에도 누추하지 않게 우아한 절약을 이어가는 삶이라 다행이다. 마음 가는 대로 산다.
+) 그럼에도 수상 후보작이었다는 영광만은 남겨두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찌질합니다. 찌질해.
+) 2020년에는 기본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