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하면 놀 시간이 없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최선을 다해 노는 한 해가 되고 싶습니다!”
2020년 설날 밤. 시댁 식구들 앞에서 호기로운 올해 목표를 외치며, 건배했다. 해야 할 일만 하며 사는 한 해보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랐다.
최선을 다해 노는 한 해를 위해, 나는 마트에서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울산 롯데 마트로 갔다. 설 명절 동안 울산 시댁에서 머물 때 쓸 유아 치약과 유아 식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4층 옥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쭉 내려가는데 마음이 바빠졌다. 옷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19000원 짜리 페리미츠 유아 옷이 너무 예뻤다. 사고 싶었다. 저 옷만 있다면 두 귀염뽀짝이들이 극적으로 예뻐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지름신 퇴치에는 약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안 사기로 다짐하는게 아니라, '이따가' 다시 사러 오자는 전술은 꽤나 효과적이다. 시간을 들이면 이미 '충동' 구매에서 '충동'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결국 일단 치약과 식판을 사러 갔다.
결국 애들 옷과 머리핀을 안 샀다. 겨울이 끝나간다. 고작 한 달 더 입힐 아이 겨울 옷으로 과연 삶의 질이 높아질까? 딱 치약과 식판 값인 31,400원을 계산했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옥상 주차장으로 올라왔다.
도도한 얼굴 아래로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해냈다! 잘 참았다! 스스로를 마구 칭찬했다. 불필요한 물건을 합리화하며 찜찜함을 달랠 뻔했는데, 필요한 물건만 사서 자존감이 치솟았다. 물건을 사서 기분이 좋을 수도 있지만, 안 사도 기분이 좋을 수도 있다.
쇼핑하면 놀 시간이 없다 1. 소비 늘 다음 소비를 고민한다.
애들 치약과 식판만 사기. 이게 바로 올 한 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최선을 다해 놀’ 비결이다.
쇼핑은 돈만 뺏지 않는다. 시간도 앗아간다. 소비 후에는 늘 다음 소비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물건이 주는 쾌감을 알고 나면, 물건을 잊어버리기 힘들다. 머릿 속에 쇼핑 리스트가 가득 차면 사유할 시간을 빼앗긴다.
사면 살수록 부족해지고 아쉬워지는 게 물건이다. 나만 해도 그랬다. 겨우내 지낼 아이 옷이 충분했다. 그런데 예쁜 옷을 보자마자 흔들렸다. 따지고보면 아쉬울 상황이 아닌데도, 새롭고 예쁜 물건은 늘 현재의 자신을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으로 만든다. 혹, 새롭고 예쁜 물건을 샀다고 해도, 한 달 뒤 더 새롭고 예쁜 물건이 나를 괴롭힌다. 물건의 굴레가 시작된다. 기분은 가라앉는다.
반대로 삶을 조망하는 사유의 시간을 가지면 돈과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책 읽고 글 쓰며 노는 동안, 쇼핑할 시간은 줄어든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물건은 정말 필요한 순간. 그 때 갈아주기로 했다. 그런 순간이 마트 갈 때마다 오진 않는다. 이번에 19000원 짜리 아이 옷. 정말 잘 참았다.
쇼핑하면 놀 시간이 없다 2. 많이 쓰려면 많이 일해야 한다.
읽고 쓰기 위해 충동구매를 참는다니. 친구 관계에는 이런 취향이 약이 됐다.
간소한 삶을 살고 나서 친구의 좋은 옷과 쾌적한 살림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감탄하고 좋아할 수 있다. 물건의 맛은 물건의 맛이고 성장의 맛은 성장의 맛이니까. 내 삶이 만족스러워야 타인의 삶이 부럽지 않다. 내 삶이 허전하고 부족해 보일 때는 남이 부러워 질투가 난다.
넓고 쾌적한 집. 예쁜 옷. 좋은 차. 좋아 보일 수는 있다. 싫을리 없다. 그럴 때는 ‘나도 한 번 친구처럼 살아볼까? 좋아 보이는데!’하고 상상해본다. 절약가의 좋은 점은, 돈을 안 쓴만큼 모인 돈이 있다는 점이다. 늘 선택의 여지가 있다. 결심하면 물건의 즐거움을 지향하는 삶으로 바꿀 수 있다. 얼마나 즐거운 고민인지 모른다.
하지만 숱하게 즐겁게 고민해도 돌아오는 결론은 돈 덜 쓰는 지금 삶이 좋다는 거다. 그 이유는 적당히 벌고 적게 써야, 시간도 돈도 남는다는 단순한 덧셈, 뺄셈 때문이다. 많이 벌려면 노동해야 하므로 놀 시간이 없다. 많이 쓰면 돈이 없다. 그러니 적당히 노동해서 읽고, 쓰고, 여행할 시간을 마련하고 싶다.
난 돈에 관심이 많다. 동시에 시간도 무척 좋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는 잉여 시간는 호사다. 좋아하는만큼 늘 돈과 시간에 대해 고민한다. 우리 부부의 소득에서 적게 쓰는 삶은 돈과 시간을 마련할 최선의 방법이다.
역시 올해 목표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최선을 다해 노는 한 해가 되는거다. 그래서 물건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공을 들이는 쇼핑 시간보다, 그 시간에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려한다. 사먹는 것보다 밥 짓는게 돈을 덜 쓰니 시간이 남는다. (식당가서 음식 기다리는 시간보다 더 짧게, 대충 요리하면 된다.) 남는 시간과 돈으로 아낌없이 놀아야겠다.
혼란스러울 수 있는 독자님이 계실 것 같아 마련한 덧)
소득에 따라 결론을 다르게 내릴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을 잡아 고소득자가 된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이 경우 조금 일해도 많이 벌 수 있겠죠. 시간과 돈, 동시에 충족할 수 있을 겁니다. 투자에 공들여 고소득자가 된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자본소득(불로소득)은 시간과 돈을 모두 주기 때문입니다.
고소득자가 되었다면, 저와 처한 상황이 다른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노동해서 얼마나 노는가’에 대한 고민은 비슷할지 몰라도, 소비 패턴이 같을리는 없죠.
세상에 정답은 없습니다. 몸담은 세계가 다르니 보는 시야도 다릅니다.
정답 없다면서 제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이유는, 글쓰는 사람은 늘 자신의 의견에 솔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는게 다 다르다며 두루뭉술한 결론을 내버리면, 그건 진심을 담은 에세이는 아니겠죠. 각기 다 다른 독자의 상황을 배려하지 않으려는게 아니라, 되려 어설픈 배려 때문에 제 경험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일단 제 생각을 솔직하게 보여주는게 글쓰는 제 몫이라 생각합니다.
동시에 제 글을 읽는 여러분께서는, 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보다, 자신의 상황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시면 좋겠습니다. 취사선택을 하시려면 사유하셔야 겠죠. 사유란게 별건가요. 하하. 글을 읽고 나서, 자신이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작가의 어떤 말을 받아들이고, 어떤 말을 버릴지를 고민하는게 사유죠.
진심을 에세이로 씁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사니 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