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호숫가에서 나온 뒤 3년의 일기
결혼 전, 대학원에서 MMPI(미네소타 다면적 인성 검사)를 받은 적 있다. 16개의 성격유형으로 단순하게 나누는 MBTI보다는 더 세분화된 인성 검사였다. 검사 결과, 내 인성은 '너무 착해.'다.
도덕적으로 선(善)하다는 말이 아니다. 남의 말 잘 듣는다는 얘기였다. 사회에서 조신한 신사임당 같은 스타일을 바라면, 칭찬 받기 위해 조신한 신사임당 같은 스타일 역할을 소화해낸다. 남들이 보기에는 거슬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란 뜻이다. 남한테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욕구에는 꽤 야박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너무 좋다. 내가 못 하는걸 하는 사람이라 존경한다.
소로우는 남한테 착한 사람이 되기보다 자기만의 판단을 따랐다. 노예 제도가 건재하고 멕시코 전쟁 따위 벌이는 나라에게 세금 낼 수 없다며, 납세를 거부했다. 그대로 감옥에 가서 <시민의 불복종>을 썼다. 이 책은 후에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영향을 준다.
<소로우의 일기: 전성기 편>은 소로우가 '월든' 숲속에서 나온 뒤 3년 동안 쓴 일기를 발췌한 책이다. 28.12달러 돈을 들여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2년 동안 살고 나온 남자가 그 후 3년 동안 쓴 일기. 남들은 목수가 고딕 양식으로 지어준 집에 살면서 반평생 빚 갚으며 살 때, 하버드 대학 1년 기숙사비만으로 평생 살 집을 지었다. 그 짓(?)을 2년 하고 왔으니, 3년 뒤 일기에서도 얼마나 자기 목소리가 강했을까.
이 일기에는 <월든>의 경험 이후의 일들이라 그런지 올바르게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다. 그래서 난 안 착한 소로우가 좋았다. 어설프게 조화를 이루며 동조하기보다, 아닌 건 아닌거라 확실하게 말해주는 소로우라 매력 만점이다.
267쪽. 우리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천성을 해칠 정도로 너무 선하거나 마음씨 고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를 위해서도 그렇다. 때때로 악인은 자신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기에 오히려 이로울 수 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은 자신과 이웃 사이를 중개하려고 뻔질나게 오갈 뿐이다.
나는 여전히 직장에서, 집에서, 친구들에게서, 어설프게 조화를 이루며 동조하며 산다. 옆에서 "어머, 이건 꼭 사야해!"라고 눈을 빛내도 "사지마요."라고 말리지를 못 한다. "자동으로 저어주는 냄비 말고 나무주걱으로 직접 저으면 되죠."라고 말을 못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눈이 반짝이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저건 저 분의 세계에서 정답임에 틀림없다. 감히 내가 타인의 세계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우습다.
소로우라면 사람 면전에다 대고 "그 냄비 사지마오."라고 했을거다. 소로우는 하나도 안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체면치레 하나 없이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랑 걸핏하면 트러블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다소 눈치가 없는 것 같기도 한 이 분의 매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을 바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끊임 없이 생각했고, 움직였다는 점이다.
330쪽. 자신의 생을 바쳐 해야 할 일에 어떤 짬도 내지 못하는 이가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몰두 하고 헌신하라. 그러면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로우는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했다. 정직하게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먹고 살고자 했다. 요즘말로는 지식산업에는 뛰어들지 않고, 투자(혹은 투기)라면 질색팔색을 했다는 얘기다.
커피와 차를 마시지 않고, 육식을 줄였다. 그 지방에서 생산된 음식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이것도 요즘말로 하면 푸드 마일(food mile: 식재료가 식탁에 오기까지 유통에 걸린 거리. 푸드 마일이 짧을 수록 환경에 이롭다.)이 짧은 음식을 먹었다는 뜻이다.
허겁지겁 생계 노동에만 매달리기보다 여가를 갖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긋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반드시 마련했다. 버터와 고기를 줄이면 적은 노동으로도 이완된 채 살 수 있었다.
매일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겼다.
134쪽. 인생의 여가란 아름답다. 집안일도 서두르면 낭비가 생기듯이, 인생에서도 성급함은 낭비를 낳는다. ... 우리가 설사 일흔을 산다 해도, 자신의 삶이 우주의 삶에 일치하는 경건한 여가의 순간을 누리지 못하고 급하고 거칠게만 산다면, 그런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 급하고 거칠게 산다.
너무 착하게만 살다보면, 인생의 여가도 없이 돈만 벌며 목적없는 자기계발형 인간으로 살다가 끝날 것 같다. 몸을 살찌우고, 더 고급스러운 물건들로 몸을 두르는 것보다 내적인 지혜와 감성으로 채우고 싶다.
소로우가 매일 일기를 썼던 것처럼, 일기를 쓴다면 갈피를 잡아나가리라 믿는다. 너무 착해 빠지지 않으려면, 역시 글부터 써야하나보다. 소로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