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혜 Nov 01. 2020

집이든, 차든, 옷이든, 가방이든,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이 '더 비싸서' 우월한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더 값이 싸다'고 해서 더 윤리적이지도 않다. 이분법은 위험하다. 


아우디 A7(*한때 나의 드림카..)이 우월한게 사실이라면 우리집 쉐보레 올랭이(*올란도의 애칭)는 열등하다. 아주 못났다. 그렇지만 못났다고 구박하기에는 얘가 너무 씩씩하다. 우리 네 식구는 씩씩한 올랭이를 타고 편안하게 어디든 다닌다. 꼭 아우디 A7처럼 멋진 자동차의 끝판왕은 아니더라도 자동차의 기본기가 단단한 녀석이라면 충분하다.


반대로 '절약' 그 자체, 즉 쓰는 돈이 적을 수록 윤리적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도 올랭이는 어정쩡하게 반성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형차라는 이유로 덜 윤리적이라면 좀 억울하다. 올랭이를 살 때 지불한 2800만원에는 안전성, 잔고장이 잘 없다는 브랜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안전하게 오래 타려면 결국 돈을 주고 값을 치를 수 밖에 없다.


작은 집과 여유로운 주말의 논리는 연결되어 있다.

집도 똑같다. 작고 낡은 우리 집을 자랑할 때에는, 그저 '작고 낡기' 때문에 사랑한 것만은 아니다. 값이 싸서 윤리적이란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누군가가 집에 치렀을 수 억의 값 속에는 그 값어치만큼의 기능이 있었으리라. 비쌀 수록 어떤 측면이 우수하기 마련인데, 그 기능을 구매하고자 한 이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동시에 저렴하다고 마냥 부족하지도 않다. 2억 신축 아파트의 세련미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지금 사는 집이 네 식구 도란거리기에 딱이다. 거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무엇보다 차 한 대로 살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이 집에 살면 차 한 대로 사는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다. 남편이 차를 타고 출근하면, 나는 걸어서 출근했다. 남편이 차를 타고 작은 아이를 등원시키면, 나는 걸어서 큰 아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열망하지 않았다. 덕분에 하루하루 소중한 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빚 없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살았고, 남는 돈은 저축했다. 


집에 물건을 채워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으니 돈도 절약됐다. 아이들 장난감도 가능한 적게 들이되, 주말이면 아이들 손 잡고 바다와 산과 계곡, 그리고 공원 중에 하나를 설레는 마음으로 고르며 살았다. 주말 아침에는 샌드위치를 쌀지, 고구마를 구울지, 그도 아니면 김밥을 말고 쿠키를 구울지 고민했다.


전세보증금 6482만원의 59㎡ 작은 우리 집. 최선의 집은 아니지만 차선은 됐다. 돈 눈치를 안 보고 자유롭게 살았다. 자유와 자립이 동시에 왔다.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궁색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성숙의 시간이었습니다.


작은 집에 살면서 '충분함'을 배웠고,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면서 최소한의 소비를 하면서도 더 바랄게 없었다. 자본주의 입장에서 궁색이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성숙이었다.


왕년에 한 계좌 털던 소비 요정으로서, 성숙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집이다. 모든게 이토록 과분한 집이건만 과분함이 콤보(combo)로, 더블(double)로 왔다. 바로 작고 낡은 덕분에 유지비가 적게 드니 저축도 꾸준히 할 수 있던 것이다. 


아껴 모은 돈으로 새 집을 계약했다. 경제적으로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걷는' 사람에게 최적화되었고, 거실 창문에서 초록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집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집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찻길 하나 건너지 않고 안전하게 간다. 자동차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둘을 둔 엄마에게는 차 없는 등굣길이 최고로 값지다.


바로 옆에 넓은 공원과 작은 산이 있고, 거실 창문으로는 태백산맥이 보이며, 무엇보다 아파트 정문에서 바로 이어지는 육교 덕분에 등굣길에 차 하나도 부딪힐 일이 없다.

작게 살며 충분함을 느끼는 삶이 목돈이 들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해주었다. 절약의 미묘한 즐거움이다. 악착 같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게 주말에 김밥을 돌돌 말며 나들이를 갔음에도 결과값이 좋다. 어쩌면 돈 덜 쓰면 돈 모이는게 당연한거다. 그런데 10년 된 자켓 입고, 7년 된 캔버스 가방을 메고, 중고 신발을 세탁하여 신고 다니는 것은 궁색이라 치부하지만, 평범한 우리 살림살이에서 이 방법 외에 경제적으로 단단한 삶을 꾸릴 별다른 도리라도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절약가, 혹은 미니멀리스트들이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그런 좋은 소식을 종종 듣고 싶다. 가정 경제의 건전함은 신용카드 할부로 산 최신형 가전제품에 있는게 아니라, 햇볕에 빨래를 말리는 중고 빨래 건조대에 있다는걸 합리적으로 설득하고 싶어서다. 그러면 쓰레기도 줄이고, 기후위기 대응에도 수월하며, 입은 옷으로 타인에게 쉽게 잣대를 들이대는 무례함도 수그러들지 않을까.


작은 집에 살든, 차를 한 대만 몰든, 입고 있는 옷의 나이가 몇 살이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경제 논리에서 '궁색'이라 딴죽을 걸지라도, 개인적으로 충분하게 느꼈다면 문제 없다. 의연하고 당찬 마음으로 성숙하고 싶다. 무엇보다 경제적 자립은 성숙에서 오니까. 궁색한 성숙인은 오래도록 자유로울 것이다.


어쨌든 집 이야기는 참 어렵다. 여기가 지방이라 이런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집을 구매해서 사느냐에 따라 자산 가치가 몇 달 사이 '억, 억'하는 대도시에 산다면, 집 선택의 기준이 다를 것이다. 동해시도 아파트에 따라 '나는 이 정도의 인간'임을 은근하게 과시하기에 종종 황당하고 때론 위축되기도 하지만, 대도시에 벌어지는 무자비한 차별에 비할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집 이야기에 정답이 있을리 없다. 하지만 집 만큼은 생각하는 대로 사(buy)고, 살(live)아야 한다. 각자의 정답, 나름의 소신으로. 조금은 배짱있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