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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혜 Nov 01. 2020

존엄하게 충분합니다.

월요일에는 퇴근 후 집에 바로 들어가질 못 했다. 나는 벌에 쏘인 발목을 치료 받으러 외과로 갔고, 아이들은 영유아검진 받으러 아빠와 소아과로 갔다. 네 식구 다시 모이니 벌써 하늘이 어둑하다. 나는 식사당번인데... 아찔하다. 집에 들어가 저녁 차릴 걱정, 저녁 차리는 동안 배고프다고 과자부터 찾을 애들, 그리고 무엇보다 몹시 피곤한 내 몸. 어휴, 외식 땡긴다!


나: "여보, 오늘 먹고 들어갈까?"

남편: "집에 먹을거 많은데, 대충이라도 집밥 먹는거 어때?"


역시나, 나의 급한 외식 충동을 남편이 잘 막아주는 편이다. 설거지 담당인 남편도 외식이 편하겠지만, 그래도 원조 절약가께서는 가능하면 집밥에 한 표 던진다. 절약하게 해줘서 고맙다고(진심으로!) 내가 애들을 잠시 데리고 있는 동안, 근처 마트에서 짜장가루, 카레가루, 그리고 우유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마트에 다녀오더니 뒷머리 긁적이며 말했다.


남편: "그래도 역시 오늘은 좀 피곤하지? 밖에서 먹고 들어가자."


깜깜한 밤에 네 식구 먹었던 짜장면, 짬뽕, 그리고 탕수육은 너무 맛있었고, 집에 돌아오니 짰고, 가계부를 쓸 때에는 좀 돈이 아까웠다. 외식은 늘 그랬다. 먹을 때는 맛있지만, 먹고 나면 '몸에 안 좋아'라고 온 몸이 외치고, 외식비를 되새겨보면 비싼 편이다.


하지만 외식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존엄할 수 있었을까. 월요일은 30분의 여유가 목마른 날이었다. 그런 날, 외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된다는 데에 충분함을 느낀다. 돈으로 시간을 사고 싶은 그런 날,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 그게 내가 생각하는 '존엄할 충분함'이다.


돈으로 시간을 사고 싶은 그런 날,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
우아하게 절약하기 X Zoom


"존엄할 충분함."


혼자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절약독서모임 멤버들과 2주에 한 번, Zoom으로 만난 덕이다. 이 시간이 있어 바쁜 와중에 사유하며 산다


지혜 언니: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만큼의 최소한의 지출은 어느 정도인지 고민 중이에요."

수남 언니: "가난(Poverty)과 충분함(Enough)의 경계에 대해서 함께 얘기해보고 싶어요."


돈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다보면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게 아니라, 우리의 존엄을 지킬 정도의 충분한 경제적 여유에 대한 바람으로 수렴한다.


2019년의 절약모임은, 글쓰기 모임도 되었다가, 올해는 절약 독서 모임으로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는 비대면으로 2주에 한 번 zoom에서 만난다.


돈을 안 쓰는게 능사가 아니었다. 존엄을 지킬 정도로 충분한 경제적 여유는 어디까지일까? 고민 끝에 나는 외식을 할 수 있었다. 맛있고, 짰고, 돈 쓰고 나니 조금은 아쉬웠던 한 끼 식사였다. 하지만 그 날 저녁 마음이 가볍고 덜 피곤했다. 행복했고 인간다운 포만감을 느꼈다.


아, 큰 돈 욕심이 안 난다. 존엄이 훼손당하지 않은 채,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때로는 커피를 마시며, 아름다운 바다 옆을 거닐다가, 건강한 두 다리로 출퇴근을 하며, 주로 집밥을 먹을 수 있는 나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피곤한 날 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알파의 경제적 여유라니. 뭘 더 바랄까.


아름다운 출퇴근길. 건강한 두 다리로 차 안 타고 다닌다. 엄청난 행운이다. (물론 차 2대 안 사기 위해 직장으로 걸어다닐 수 있는 집을 잡았다.) 
하늘과 플라타너스, 책과 커피, 그리고 음악을 향유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돈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돈이야말로 다다익선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뭐든 대가 없이 얻을 수는 없다.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돈이 많으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 쉬운 일은 없다.


오늘 학생 도박 중독 예방 담당자 연수를 받았다. 도박 중독의 화근은 적은 노력으로 큰 대가를 바라는 사행심이다. '어쩌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마음은 그 기대심리 때문에 재미있기도 하다.


돈이 궁해서 손가락만 빨던 아이들이 도박을 시작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는게 무료하고 재미없고 심심한 아이들이 재미삼아 도박에 시작한다. 홀짝에서 사다리, 달팽이 경주에서 시작해서 카지노 도박인 바카라까지 교실에서 판을 벌인다.


공부는 따분하고, 학교 밖을 나가도 그다지 즐거운 여가 생활을 누리는 법을 배운 적 없으니, 도박이 더 재밌는거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랜덤박스' 같은 묘한 흥분과 그 대가가 '돈'이니 얼마나 재밌을까.


실천으로까지 이어지면, 학생 신분으로 수 천 만 원까지 빚지는 도박중독자가 된다. 심지어 불법 도박은 '형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 감옥에도 가고, 벌금도 낸다.


어른도 그렇지 않은가. 누가 무슨 주식으로 얼마얼마를 벌었다 하면 귀가 팔랑거리고, 누가 어디에 집을 사서 얼마얼마 차익이 생겼다 하면 나는 왜 부동산 공부를 안 했는지 땅을 친다. '어쩌면' 큰 돈을 벌지도 모른다는 기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이들이 교실에서 불법도박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면, 사는게 재밌어야 한다. 도박보다 재밌는게 많은 아이들은 도박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


어른도 하루종일 비트코인 동향과 주식의 시세를 살피느라 마음이 허해지지 않으려면, 사는게 재밌어야 한다. 


언젠가 큰 돈을 벌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기대로 오늘을 피폐함으로 누적하지 않으려면, 파란 하늘과 플라타너스 잎의 어울림이 예뻐야 한다. 저녁 햇살 속에서 몸을 데우며 책을 읽는 그 순간이 행복하면 된다. 보통의 완벽한 날들을 감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된다.


오늘도 연수를 받느라 출장 다녀와 피곤했다. 해가 저물었는데 언제 밥 하지? 애 둘 데리고 가까운 식당에서 새우롤, 연어롤, 그리고 우동 한 그릇을 먹고 왔다. 소박하다 말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호사다.


이 정도면 존엄하게 충분하다. 


검소하다 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호사를 누린다.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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