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우리가 사랑했던 홍반장
비긴 갯마을 차차차
처음 내가 갯마을 차차차를 보기 시작한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이 드라마를 발견한 순간, 나는 이에 대해 아예 알지 못했고 당연히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에서 처음 내가 마주한 갯마을 차차차의 첫 장면은 공진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평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저 흘러가는 장면 중 하나였을수도 있었을테지만,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이웃의 얼굴도, 성도 이름도 모르는 나와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북적이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한 편으로는 조금 부럽기도 했다. 자연스레 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만능백수 홍두식
드라마를 보기 전에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등장인물 소개를 꼭 읽어보는 편인데, 처음에 홍반장의 직업이 백수라는 것을 보고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참 많은 드라마를 봐왔지만, 주인공의 캐릭터가 무직인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반장은 공진에서 그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이미 밖에 나와버린 혜진이네 집 고데기 코드 뽑아주기.. 부터 시작해 공진반점 짜장면 배달하기, 슈퍼 카운터 봐주기, 횟집 서빙하기, 카페 음료 제조하기 등 가지각색의 일을 도맡아 한다. 물론 급여도 있다. 급여는 철저히 최저시급으로 계산한다. 촤라락 하고 펼쳐지는 자격증의 갯수를 셀 수 없을만큼 홍반장은 못하는 게 없다. 처음에 백수라는 이유로 웃음을 지었던 것도 잠시, 이런 홍반장의 캐릭터가 조금씩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을 사람들이 부르면 달려가는 홍반장이, 직접 천연 비누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선뜻 나누어 주는 따뜻한 홍반장이, 내일보다는 오늘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살아가는 홍반장이 이제는 누구보다 멋져 보인다. 아무리 봐도 못하는게 없더니, 이제 내 마음까지 들어오다니.. 대단하다. 홍두식이라는 사람이 참 마음에 든다.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
두식이와 혜진이는 처음부터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실상 앙숙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둘이 서로 좋아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과정까지 마냥 당연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홀로 공진이라는 마을에 오게되고, 홍반장과 계속 엮이게 되고, 싫은 듯 하면서도 내심 그리 싫지만은 않고, 위기에 처했을 때 나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주는 홍반장을 사랑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사랑에 있어서 궁금했던 것은 사랑이 뭔지,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인지가 아닌 ‘내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였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과연 언제 알 수 있는 것인가? 두식이와 혜진이의 서사가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갯마을 차차차를 보고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순간부터이다. 내가 설마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아닐거야.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동시에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두식이와 혜진이는 꽤 긴 시간동안, 자신의 감정을 부정한다. 하지만 결국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야 만다. 퉁명스럽게 부르던 치과라는 호칭에서, 다정하게 혜진이라는 이름을 불러준다. 인스턴트 연애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서,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들만 모르게 느리게 흘러가는 사랑의 시간들을 보며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그래서 나 또한 부정하지 않겠다. 식혜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식혜커플은 좋아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
사연투성이 사람들
갯마을 차차차에는 두식이와 혜진이를 포함하고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감리씨, 화정이모, 영국아저씨, 남숙이모, 미선이, 은철씨, 초희, 왕작가, 도하, 춘재아저씨, 오쭈리, 이준이, 금철삼촌, 윤경씨, 보라. 그리고 이들에게는 각기 다른 사연이 있다. 공진에 다시 온 이유를 꽁꽁 숨기고 살아가는 두식의 사연을 중심으로 영국과 이혼한 이유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화정의 사연,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조리 떠들고 다니는 수다쟁이 남숙의 사연, 첫사랑이 누구인지 비밀로 할 수 밖에 없는 초희의 사연, 지피디를 사랑하면서도 고백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지원의 사연이 있다. 이 밖에도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연도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사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사연투성이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연을 힘겹게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연을 혼자 다 껴안고 가지 않아도 된다. 두식이처럼, 화정이처럼, 또 그 누구처럼, 힘겹게 안고 살아갈수록 아픔의 시간만 길어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서 비롯된 아픔이든지 분명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다른이의 품에 안겨 실컷 엉엉 울다가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오랜 시간동안 아파하지 않기를, 그래도 반드시 아파야 한다면 그 아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으면 한다.
참으로 무해한 여름
내가 갯마을 차차차를 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 마을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공진이라는 마을이 실제로 있을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도와줘요 홍반장! 이라고 외치면 달려올것만 같은 홍반장 위로 파랗게 넘실대는 바다, 새빨간 등대, 뉘엿뉘엿 지는 노을, 언제나 그 자리에 우직하게 서있는 배. 공진의 마을 풍경이 아직 생생하다. 힘이 들때마다 가끔씩 이 드라마를 꺼내볼 것 같다. 공진에 잠깐 문을 두드릴 것 같다. 그럼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반갑게 맞아주지 않을까. 이런저런 위로의 말 대신 밥을 한가득 눌러담은 밥상을 내밀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을까. 그리고 다같이 파도로 달려가 아무 걱정 없이 발을 담그며 첨벙이지 않을까. 갯마을 차차차와 함께한 여름은 눈부실 정도로 따스했다. 그리고 참으로 무해했다. 어딘가에 있을 공진이라는 마을에서 모두가 가끔은 투닥거려도 도란도란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를. 올해 여름과 가을을, 곧 다가올 겨울을, 봄을, 또 다시 돌아올 여름 속에서 지금처럼 잘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