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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언 Oct 05. 2020

아침드라마는 왜
김치 싸대기를 날렸을까?

우리 엄마 때문에

어느 평범한 하루의 저녁,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려던 찰나 거실 TV 속에서 한 남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생각 없이 소파에서 TV를 보던 엄마 옆에 앉았다.

“저 사람 왜 저렇게 화가 났어?” 내 물음에 돌아오는 엄마의 대답에 나는 당황했다.


“응, 몰라”


처음엔 엄마가 말하기 귀찮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나도 가끔 말하기 귀찮을 땐 모른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곤 한다). 그런데 어떤 드라마를 봐도, 어떤 영화를 봐도 엄마는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게 그런 내용이었어?” 맥 풀리는 소리를 하거나 다큐를 볼 때도 기본적인 내용부터 설명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나는 단지 엄마가 졸렸거나 혹은 집중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가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엉뚱하게도 내가 마케터로서 일하며 얻은 작은 깨달음으로부터 주어졌다.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우리 회사의 타겟층은 성인, 그중에서도 재테크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시드머니도 보유하고 있는 3040이었고 넓게는 5060도 포함이었다. 나는 타깃 고객을 위한 프로모션을 정기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해왔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유독 중장년층 고객분들의 프로모션 관련 문의가 많았던 적이 있다. 무슨 문제가 있나 하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아, 실수다. 싶었다. 기존 프로모션에서 살짝 변화를 준다는 의도였는데 참여를 위한 허들이 너무 높아져버린 것이다. 

“분명 설명은 잘해놨는데” 라며 은근히 나의 과오를 회피해보려 했지만 사실 나는 나의 실수를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다. 분명 빠진 내용은 없었으나 이번 프로모션의 메인 타깃이었던 4050 혹은 그 이상의 고객들이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은 내용이었던 것이다. 타깃층의 특성을 고려한 프로모션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마케터의 기본 중의 기본일 터, 나는 내가 2030이라는 이유로 프로모션을 내 눈높이에 맞추는 편협한 실수를 했다.


그때 문득 엄마가 생각이 났다. 나한테는 당연한 것이 엄마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엄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엄마의 시선에서 해석해보고자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엄마가 아침드라마를 보는 이유였다.



아침드라마는 친절하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침드라마를 즐겨봤는데 난 아무리 봐도 ‘저게 뭐가 재밌을까’ 싶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아침드라마는 친절하다.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다. 엄마는 주로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면서 아침드라마를 보는데(틀어놓는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다른 일을 하면서 드라마를 보면 인물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놓치기가 쉽다. 그런 시청자층의 특성을 잘 파악해 아침드라마는 했던 말을 반복해서 한 번 더  말하고 앞 장면을 놓쳤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뒤에서 다시 설명해주었다.


아들 : 제가 사랑하는 OO 이와 결혼하겠습니다. / 엄마 : 뭐? OO이랑 결혼을 해? (뒷목 잡고 쓰러짐)
남편 : 나 사실... △△씨와 사랑해.. / 아내 : 뭐? △△씨랑 사랑을 한단 말이야? (싸대기)
의사 : □□씨는 기억상실증입니다. / 보호자 : □□이가 기억상실증이라고요? 기억상실증이라니요!



아침드라마는 직관적이고 자극적이다


그리고 아침드라마 속 인물의 감정은 직관적이고 자극적으로 나타난다. 세상 떠나가라 웃는 장면, 버럭 소리 지르는 장면, 펑펑 우는 장면 등 모두 아주 직관적이었다. 미묘한 표정 변화와 말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감정선 같은 건 아침드라마의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쁘면 기쁘다, 슬프면 슬프다, 1차원적으로 시청자에게 바로 전달하는 것이 아침드라마의 특징이다. 그러다 보면 싸대기를 날리는 장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싸대기도 조금씩 더 신선하게, 조금 썩 더 자극적으로 점점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김치 싸대기 되시겠다.


김치싸대기, 된장싸대기
김밥싸대기, 스파게티 싸대기



그냥 보는 거지 뭐


엄마가 TV를 보면서 가장 자주 했던 말이다. 그 말 그대로 엄마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 없이 그냥 보는 것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왜 그럴까? 엄마가 왜 그러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침드라마의 주 시청자층은 경제적 혹은 정신적 여유가 없이 살아온 세대라는 점에 있다. 그들은 극을 이해하기에는 삶의 여유가 없어 문학적 감수성 같은 게 쉽게 자극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아온 그 세대의 어머니들에게 젊은 남녀가 꽁냥대는 일반적인 드라마는 너무 순한 맛이었을 것이다. 매콤한 불륜, 복수, 집안싸움, 권선징악이라는 조미료가 더해지면 비로소 입맛에 맞게 된다. 이런 점을 아침드라마는 잘 파악을 하고 겨냥했기에 발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김치 싸대기까지 날리지 않았을까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김치 싸대기 자매품으로 예나가 선정이 딸이라는 말에 주스를 뱉는 장면도 명장면으로 꼽힌다.


아침드라마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 타깃층의 취향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심도 있게 고려해 이런 감칠맛을 만들어 낸 아침드라마 작가는 역량이 뛰어난 마케터 그 이상과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일상 속에서 한 수 배웠다. 김치 싸대기만큼의 임팩트를 날릴 수 있는 마케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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