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꿈, 그리고 음악
벅차오르는 감동과 진한 여운으로 가득 찬 두 시간이었다
다미엔 차 젤레. 이제 갓 30대가 된 이 신예 감독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음악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평단의 극찬을 받았던 데뷔작 위플래쉬에 이은 두 번째 작품, 라라 랜드에서 다시 한번 독보적인 입지를 증명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단지 '라이언 고슬링'이 나온다는 이유가 관람 목적의 전부였다. 드라이브 이후로 그의 폭발적이면서 동시에 침착한 특유의 연기가 더 보고 싶어 져 거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섭렵했었다. 장르에 상관없이 매번 비슷한 듯하면서도 색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지금까지의 행보만 보아도 라라 랜드에서의 역할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기대는 200%, 300%의 만족으로 페이백 되었다.
이미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은 알겠지만, 라라 랜드에는 다분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낭만적인 사랑과 꿈, 그리고 음악이 정말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혼합되어 있다. 장르적 특성으로 볼 때 로맨스, 뮤지컬, 드라마 요소가 한데 버무려져 있기 때문에 다소 밸런스를 유지하기가 힘들 수도 있었는데 그걸 또 보란 듯이 마스터피스로 연출해냈다. 실상, 이러한 부분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었다. 몇몇 뮤지컬 영화 애호가분들은 본 영화가 정석적인 뮤지컬 영화로서의 특징을 어설프게 흉내 냈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사실 나도 이 부분은 동의한다. 시카고나 물랭루주와 같은 걸작들에 비해 뮤지컬 영화로서의 전개나 비주얼적 화려함은 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라라 랜드를 뮤지컬 영화로 국한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삶과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들이 정확히 하나로 합치되기 때문이다. 행복할 때도, 아련할 때도 재즈 음악은 함께한다. 행복감을 증폭시켜주기도 하고, 반대로 슬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재즈란 무한 변주가 가능한 '현재의 음악'이며 우리의 삶 역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같은 속성을 가진 무형의 존재들인 삶과 재즈는 영화 안에서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 아래 만나 예측 불가능한 희로애락을 선물한다.
영화의 배경과 연출 방식도 굉장히 흥미롭다. 현대 도시의 모습을 주무대로 하고 있지만 올드 필름을 오마주 하는 듯한 장면들, 극 중 리알토 극장에서 상영 중인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 등 예술과 낭만이 황금기였던 시대를 반추하는 듯한 소스를 적절하게 배치시켜 저 깊은 데서 올라오는 향수의 감성에 허우적대게 만든다. 반대로 엠마 스톤이 친구들과 파티에 가서 독백으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 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저녁노을 아래 탭댄스를 추는 장면 등은 전체적인 색감이 굉장히 세련되고 화려하다. 레트로와 모던함을 적재적소에 배치시킨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시대극을 좋아하는 편이라면, 충분히 흥미롭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 사랑 이야기도 좋았지만, 청춘들의 꿈에 대한 진정성과 그 자체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더 크게 와 닿았다. 카페 알바를 하며 대배우의 꿈을 꾸지만 오디션에 매번 탈락하는 배우 지망생, 자신만의 클럽을 열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레스토랑에서 캐럴을 연주하다 그마저도 해고당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직업적으로는 평범하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분명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거야' 혹은 '나는 그 일을 반드시 해낼 거야'와 같은 희망들은 때때로 청춘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주관을 믿으며 전진하는 그 모습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도전, 성공, 실패, 좌절, 열정, 희망, 순수, 낭만, 사랑, 이별, 고통, 고독과 같은 정말이지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는 단단함과 성숙함을 얻게 되는 시기. 사회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중년들이 가장 많이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이 '청춘'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루하루가 불안하지만 또 설레고, 좌절하지만 또 희망을 품는, '인간다움'을 직접적으로 체화하는 그 시기.
나 또한, 주인공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생각했던 혹은 계획했던 목표들은 하나씩 이루어 나가고 있지만, 궁극적인 이상과 꿈에 이르기엔 아직 너무나도 역부족이다. 하지만, 겁나진 않는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항상 불확실과 선택의 순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작가 혹은 영화감독이 되길 바랐었지만 제대로 된 서포트를 받기 어려워 떠밀리듯 선택했던 공대는 내 성향과 맞지 않았고, 학교 밖으로 여러 가지 활동들을 경험하면서 방황 아닌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의 간극은 너무나 무거운 짐처럼 다가왔고, 해소되지 않는 고민과 걱정은 답답함과 한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어떠한 도움도 없이 혼자 헤쳐나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독하다. 내 주변 누군가에게 말을 꺼내도 그 사람은 진정으로 내가 가진 생각과 이상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더 강해져야만 한다는 강박의식이 자리 잡은 것 같다. 다행히 이제는 한층 유연해졌다. 거르지 않았던 글쓰기, 운동, 창업 활동과 관련된 그간의 노력들이 하나 둘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오고 있다. 극 중 주인공들의 분투가 누군가에게는 허울뿐인 낭만으로만 비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노력, 고민, 슬픔, 쟁취가 영화 속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로 다가왔다.
엔딩 10여분은 전반부에서 조금씩 느껴졌던 연출적 미흡함을 일말에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더불어, 3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는 길고 긴 여운을 선사했다. 5년 만에 만난 주인공들이 서로를 애타게 바라보는 장면은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그것이었다. 라이언 고슬링의 우수에 찬 눈빛과 미묘한 웃음은 "난 아직도 너를 사랑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겠지. 참 우리 그때 행복했었다, 그렇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1시간 50여분 동안, 무의식 중에 '세바스찬'과 '미아'가 돼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감정을 100% 공감할 수 있을 때 다가오는 깊은 여운은 막으래야 막을 수가 없다. 예상 가능한 해피 엔딩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씁쓸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함께 했던 누군가를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떠나보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이별도 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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