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삶에 대하여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정말이지 가장 과소평가된 명감독 중 한 명인 것 같다. 비포 시리즈에서 사랑과 낭만의 끝판을 보았다면 보이후드에서는 날 것 그대로의 인간 성장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의 보이후드이다.
무려 12년 동안 매분 15분씩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명실상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 제작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이 화면의 전환과 함께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하나의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경이롭고 신비롭다. 동시에, '나의 성장기도 저랬을까' 하는 원초적인 의문과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자식의 특정한 시기를 비디오 캠으로 담아낸 부모들은 많을 테지만, 이렇게 짜임새 있는 연출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가장 비중이 큰 연출 방식은 바로 '리얼리티'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연출 과정에서 별 다른 고민이 없었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들의 근원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화면 장식과 미장센을 배제시키고 인물들의 대사와 연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외피적인 영화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의 삶은 결국 '흘러간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모든 인간관계와 행복의 순간들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 더불어, 인종과 상관없이 누구나 유사한 성장기와 고민의 터널을 지난다는 것.
반대로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 깊이 있는 추가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가족의 역할과 해체, 그것이 한 인격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다. 메이슨의 어머니인 올리비아는 메이슨 시니어를 비롯해 총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게 된다. 첫 남편인 메이슨 시니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알코올 중독자이자 권위적인 아버지들인 탓에, 사회의 가장 기초적 소집단인 가족 내 소통과 화합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말 수는 줄어들고 외골수의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다행히도, 메이슨 시니어는 가장 처음 해체된 가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아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서포트를 아끼지 않는다. 함께 여행을 하고, 식사를 하고, 친구같이 편안한 대화를 나누면서 메이슨만이 가진 잠재력과 예술적 감성을 이끌어내는데 큰 일조를 한다.
덕분에 메이슨은 '사진'이라는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하고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게 된다. 무릇, 부성애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할 자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아버지의 역할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링클레이터 감독이 메이슨 시니어를 중요한 캐릭터로 부각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인 것 같다. 아이들과의 참된 소통이 인격의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가족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을지언정 MIND-CONNECTED 된 집단임을 담담하게 역설한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가족 내 주도권이 변화되는 시점이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쑥 커버린 사만다와 메이슨은 각자의 인생을 위해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게 된다. 이때, 올리비아가 내뱉는 대사들은 아직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한 나도 쉽게 공감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나는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내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결국엔 혼자가 되는. 텅 비어버린 집처럼 마음속도 공허해진 올리비아는 이제 쇠퇴기의 길을 걷는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주어진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내 가족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순간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됐건, 시간은 계속 흐른다. 유한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믿음을, '해체'라는 부정보다는 '연결'이라는 긍정을 수용하면서 흐르는 순간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일상과 낭만이 합치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말미 두 남녀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삶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진리를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우리가 순간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우리를 잡아두고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