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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Feb 03. 2017

about MOVIE_멀홀랜드 드라이브

'무'를 말하다

난해한 작품이었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시선을 압도하는 다양한 미장센과 보고만 있어도 불안해지는 핸드헬드 카메라 워킹,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폭발하는 다양한 서스펜스들이 화면 속에서 난무한다. 특히, 마치 내가 화면 속에 있는 것만 같은 1인칭 시점의 카메라 움직임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기괴한 배경음악은 두 눈 뜨고는 차마 영화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데이비드 린치가 왜 컬트의 거장인지 확실히 입증해주는 작품이다.

사실, 이전에 후반부만 살짝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도 '도대체 이게 뭔가'하는 충격 아닌 충격 속에 영화를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어찌 됐건, 앞 내용들이 너무나 궁금하여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영화를 감상했는데 역시나 '전형적인'영화의 구성 혹은 장르성과는 너무나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다소 거북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여태껏 자주 보지 못했던 색다른 감성이 있어 좋았는데, 어떠한 부분에서는 레오 까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가 연상되기도 했다.


지르박 댄스 대회에 참가한 베티(꿈 속에서의 이름)와 댄서들이 춤추는 장면이 흘러나오며 영화가 시작된다

복잡한 스토리 전개 방식과 메타포적인 미장센들의 향연이 관객들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지만, 실상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영화의 주제는 간결한 편이다. 한 네티즌이 '이해하고 나면 굉장히 슬픈 이야기'라고 했는데, 나 역시 이 감상평이 가장 와 닿았던 것 같다. 영화 속 꿈과 현실은 그 본질적 속성을 그대로 따라 매우 대조적으로 비친다. 주인공 다이안(현실에서의 이름, 나오미 와츠)이 현실에서 느끼는 비참함과 수치심, 분노의 감정과 같은 것들이 꿈속에서는 진실한 사랑과 재능, 타인의 인정 등 긍정적인 영향 요소로 치환되어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무형적 가치, 예를 들자면 공포심과 두려움, 운명 등을 의인화하여 실제 '인간'에 대입하는 실험적 방식을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영화 곳곳에서 카우보이, 흉측한 몰골을 한 걸인이 스토리의 전개와 상관없이 불쑥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즉, 현실에서의 실제 감정들이 꿈이라는 무의식 세계에서 '인간'의 형태로 전이되었음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영화에 깊게 몰입하여 보다 보면 이 인물들이 등장하는 씬에서의 분위기와 대사가 원인 모를 공포심과 두려움을 영화 밖으로 고스란히 전해준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걸인이 나오는 장면에서 무언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 감독의 연출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막함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이 불안한 눈빛을 한 남성과 하얀 벽을 번갈아 가며 클로즈업 해 들어가는 장면은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꿈 속의 베티와 리타

꿈속에서 다이안은, 현실 속 카밀라(꿈속에서는 리타)의 위치에 서게 된다. 실제로 그녀는 사랑의 주체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었던 카밀라와의 관계에서 항상 을의 입장이었다. 주도권을 쥐지 못한 채 위태로이 이끌려 다니는 데 급급했다면, 꿈속에서는 그와 반대로 리타의 기억을 추적하는 과정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후반부, 현실과 꿈의 통로 역할을 하는 열쇠를 통해 현실로 돌아온 실제 다이안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여전히 카밀라를 향한 일방적 사랑과 배우로서의 열등감에 절어 있는 결핍 속 인물로 묘사된다.


꿈 속에서 함께 연기 연습을 하는 베티와 리타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굳이 분석하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저 독특한 예술로서 있는 그대로를 즐기면 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곧 우리가 얼마나 예술을 '이해하고 파헤치는데'만 몰두해왔는지를 따끔하게 질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국의 BBC에서는 21세기 최고의 작품 중 1위로 이 작품을 선택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사실 이전부터 유사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들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주제 측면에서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 이외의 요소들 즉 영화의 형식과 비주얼, 대사, 인물과 사물들의 배치나 엇박 타 듯 독특하게 이어지는 대사 타이밍 등 모든 것들이 극단의 독창성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마치 누군가의 꿈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경이로운 체험을 선사하고 있기에 1위 타이틀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한 마디로, '영화=꿈과 무의식'의 등식이 성립하는 최초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이안에게 수치심을 주는 리타와 그의 이성연인 감독 '아담'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다 기괴하게 게워내는 장면, 정면 추돌사고, 동성애와 불륜 등 조금은 보기 거북한 장면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그것들이 결국 하나 둘 축적되어 영화 전체를 감싸고도는 독특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할 장면들임에 틀림없다. 기존의 영화적 구성 방식에 다소 질려 있었던 사람이라면,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을 작품인 것 같다.

중반부, 어느 공연장에서 사회자는 설파한다. '이건 다 꿈이야,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단지 무의 세계일 뿐이야.'라고 영화 밖의 우리들을 아주 쉽게 조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여성이 외치는 말. 비로소, 환상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SILEN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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