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로서의 성장
달빛 아래선 누구나 푸르르다.
문라이트는 확실히 친절한 편은 아니다. 배리 젠킨스 감독은 설명과 남루한 대사를 최대한 배제시키는 대신 이미지와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여 우리의 감수성을 아주 섬세하게 자극한다.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일반적으로 작품 내에서 대사나 내레이션으로 대체할 법한 장면들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 마약 흡입, 동성애적 정체성의 확인, 교내 폭행 사건 등 다소 거북할 수도 있는 소스들을 전면에 내세워 우리가 외면하려 했던 '현실'을 똑똑히 직시하도록 만든다.
직시한 현실을 공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감독은 색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제목과 같이 달빛처럼 푸르른 색감이 등장하는 씬은 '긍정'의 기운이 퍼지는 순간들인데 반해, 붉은색은 주인공 '샤이론'을 위협하는, 혹은 억압받는 순간에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한 마디로, 미장센이 굉장히 풍부한 영화인데 별 다른 부담 없이 볼 법 한 드라마 장르를 원하는 관객들의 경우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핸드헬드나 극단적인 클로즈업 등 촬영 기법 측면에서도 특징적인 요소들이 엿보이는데, 다행히 영화의 전체적인 정서, 다시 말해 소수자로서의 '불안정한 삶'이라는 타이틀과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가 먹먹함과 스러질 것 같은 마음을 담아냈다면, 배리 젠킨스의 그것은 터질 것 같은 분노와 불안함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후안'은 샤이론의 성장과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혈육 관계는 아니지만, 후안은 샤이론이 자신과 같이 마약 딜러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샤이론과 틈틈이 유대를 쌓으며 이 어린 소년이 건강하고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후안이 뱉는 대사들이 영화의 결론적인 핵심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어느 날 해변가 밴치에 나란히 앉은 샤이론에게 자신의 어릴 적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달빛 아래서는, 모두가 푸르르다'
는 말을 한다. 이 말은 곧 성적 정체성과 인종 따위가 결코 한 인간의 속성을 규정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언젠가는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는 말을 하게 되는데, 즉 시련과 고통의 순간들이 찾아올지라도 끝내 그것들을 이겨내고 온전히 샤이론의 길을 걷길 바라는 후안의 진심을 파악할 수 있다.
후안 역을 연기한 메허샬레하쉬바즈 알리는 오늘 아카데미를 포함하여 총 36개의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는데, 처음 그의 연기를 접했던 작품은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였다. 사실, 이 작품에서는 역할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큰 배우가 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다. 이후 웰메이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시리즈를 지나 이번 작품에서 마침내 배우로서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한 구역을 담당하는 흑인 마약 딜러로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가정적이고 자상한 어른의 모습을 동시에 선보이는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청년이 된 샤이론은 본격적으로 시련의 성장기를 맞이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따돌림과 언어적, 육체적 폭력을 당하게 되며 홀어머니의 마약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져 일상생활의 지속마저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친구인 '케빈'에게 우정 이상의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 감정은 어느 날 달빛 아래 해변가에서 어떠한 교감으로 연결된다. 이후,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샤이론은 타 지역의 소년원에 수감되며 자연스럽게 케빈과 멀어지게 된다. 감독은 소수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흑인, 성적 소수자, 가난, 편모 가정 등 샤이론의 자아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그의 선택에 개입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뒤틀린 존재가 되도록 조장한다. 어떤 장면들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다수의 편에 서있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일종의 무의식적 우월감이나 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다음 나는 지금껏 살면서 불편한 시선을 보냈을 과거의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도 그저 '인간'일뿐인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모습으로 반응했던 걸까 싶어 순간 자조적 위선과 초라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불친절한 영화가 고마워졌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소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를 돌아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샤이론의 모습은 이전과 180도 달라져 있다. 하지만, 우연찮게 만나게 된 오랜 친구 케빈만은 우락부락한 근육과 귀금속, 화려한 자동차와 좋은 집에 가려진 샤이론의 '진짜 모습'을 탐지해낸다. 몇 번의 대화를 거쳐 그의 상처받은, 그로 인해 자신에게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소년과 청년의 샤이론이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어른의 모습이 되지 못한 샤이론은 여전히 과거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그 기억들을 의도적으로 잊고 지낼 뿐이다. 하지만, 케빈을 만나 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듣고는 조금씩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배리 젠킨스 감독은 <라라 랜드>의 다미엔 차첼레 감독과 더불어 할리우드의 젊은 거장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정말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영화의 미학적 디테일함은 신예 감독 '자비에 돌란'과 비슷한 거 같고, 그 안에서 내용을 풀어내는 방식이나 주제의 깊이를 보면 또 다른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이 떠오르기도 한다. 조심스레 예상해보자면,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몇 편 더 선보이지 않을까 싶다. 그의 비상을 기대해보도록 하자.
나는 나야. 나답게 살고 있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