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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Mar 06. 2017

어린아이와 미국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미국에 사는 이종사촌 집에서 한 달 동안 묵을 기회가 생겨 친형과 함께 난생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원래는 형만 갈 계획이었지만, 워낙 흔치 않은 기회다 보니 부모님께서 어렵사리 비용을 마련하여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더 큰 무대를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처음 경험해보는 장시간 비행에 한껏 들떠있었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약 14시간 동안의 비행을 끝내고 미국 땅을 밟았던 순간, 나의 모든 피부를 향해 밀려들어 왔던 상쾌한 공기(공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나라의 독특한 분위기 같은 것.)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아마도, 나는 첫 순간부터 미국이라는 나라에 매료됐던 것 같다.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뉴저지 외곽의 드넓은 대지와 자연, 간간이 보이는 공장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다시 이곳에 와서 내 꿈을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는데 말이다. 아, 그토록 도전적이었다니. 순진함에 웃음이 난다.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분명 그 순간 속으로 되뇌었던 그 다짐은 사실이었음에 틀림없다. 모든 것들이 거대하고 장엄한 기운으로 가득 찬 새로운 환경을 처음 마주하게 된 순간은 하나의 짧은 다큐멘터리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는데, 고민이 깊어지거나 사색에 빠질 때면 몇몇 장면들이 느닷없이 찾아와 용기와 설렘으로 충만하게 해준다. 이후로 1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든 순간들이 기억이 되었다가 다시 휴지통으로 들어갔다가 결국에는 영구 삭제되는 순환을 반복하게 되었는데, 그만치 어렸던 열 살의 여름방학만은 여전히 팔딱거리는 떨림으로 남아있다.


한 달 동안의 미국 생활은 정말 꿈만 같았다. 뉴욕의 거리를 휘젓고 다닐 때면 들쭉날쭉 솟아 있는 고급스러운 빌딩들이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처음 마주하는 광경에 무섭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호기심에 그곳에서 먹고 있던 작은 알갱이 모양의 사탕을 떨어뜨린 기억이 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처럼, 나는 엄청난 높이에 무서워하면서도 펜스에 조금씩 다가갔고 손에서 떨어지고 난 다음에야, ‘저 밑의 사람이 사탕에 맞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싶은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근 며칠 동안 간이 콩만 해 진 상태로 걱정에 빠져 지냈었다. 나도 이렇게 천진한 시절이 있었구나 싶어 문득 그때 그 날들이 떠오르면 잠시나마 흐뭇해지곤 한다.


그것 말고도 디즈니 랜드에서 원 없이 놀았던 날, 깊은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 한날, 동네 주민이 총기를 들고 싸우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하게 된 사건까지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세상’을 경험했다. 짧았지만 그곳의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본격적으로 영미권 문화를 접하게 된 시점도 그맘때쯤이었다.


성장기의 새로운 경험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우리들의 호기심을 증폭시킴과 동시에 해소시켜주고, 새로운 것을 보는 순간 새로운 사고의 틀이 형성된다. 그런 경험들이 하나 둘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건강한’ 성장이 가능해진다. 현실의 삶이 고달픈 누군가에게는 복에 겨운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짧은 시간이 내가 ‘특별하다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학창 시절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며 잊을 법한 때가 오면 깊숙한 곳에서 자꾸만 누군가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건 절대 지우면 안 된다고. 간직하라고. 너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그 날까지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이 기억 속 그곳으로 들어가 그때는 정말 너를 펼쳐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귓속말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 정도면 세상 물정 몰랐던 ‘어린아이의 미국 여행기’는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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