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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Mar 07. 2017

열심히 사는 것 열심히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열심히 사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일인데.

아, 지나온 나날들을 생각해보니 나는 열심히 사랑하는 것까지도 열심히 사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다지도 숨기고, 사리고, 회피했던 것일까.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나를 보듬어주었던 그 사람들은,

열심히‘만’ 사는 모습에 지쳐 결국, 나를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그렇듯 다툼이 반복될 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하염없이 늘어놓곤 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 꿈과 미래가 먼저인 것 같다며,

굳이 내지 않아도 될 생채기를 그 사람 가슴에 한 줄 두 줄 그어댔다.


이것 또한 되짚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란, 개뿔 그런 건 없었다. 그저 급하게 핑곗거리를 찾았을 뿐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나는 열심히 사랑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그저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고독감을 그리도 증오하여,

그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누군가와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포장했는지도 모른다.


이별 앞에서, 우리는 다투지 않았다.

나는 미안함을, 그 사람은 서운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재생될 수 있는 정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의 ‘좋은’ 감정들이 닳고 닳아 소멸해버린, 그런 상태였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냥 알겠다고, 앞으로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열심히 사는 것을 포기할 순 없다.

사실 나는,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고달픈 삶 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내가 지켜내야 할 소중한 그분들이 있기에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열심히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을.

관계의 기준이 한쪽으로만 수렴하게 되면 반대쪽에 남겨진 사람이 상처를 떠안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더 드러내고, 표현하고, 내던져야 한다. 그 사람에게로.

그 사람의 상처가 겹겹이 쌓여 고름이 되고 마침내 그것이 문드러져 사라져 버리기 전에,

그전에 나의 온기를 태워 그것들을 덮어주어야 한다.


아, 이제는 정말 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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