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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Mar 11. 2017

V O I D

공동은 공동이 아니다.


현대미술관에서 '보이드' 전시를 감상했다.


‘보이드’라는 영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여태 그것과 관련된 전시를 본 적이 없어 과연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였을지 궁금했다. 전시관 내부에 천막이 쳐져 있는 몇 개의 공간이 있었는데 그중 처음 보이는 천막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자마자, 나는 벙 찌고 말았다. 정말 그 단어 뜻 그대로 넓은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짧은 길이의 의자 벤치 세 개와 그 위에 앉아있는 관람객 세 명만이 거대한 공간이 머금고 있는 전부였다. 나는 ‘이게 무슨 작품이란 말인가’ 싶으면서도 일단은 자리에 앉아나 보자는 생각으로 비어 있는 벤치에 가서 살며시 앉았고,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바람과 공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편안했다. 그제야 이리저리 돌리던 눈을 잠시 멈추고 최대한 움직임을 배제한 채 곤두 서있던 오감을 공간에 맡겼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다른 주제로 전시가 한창이었는데, 흔히 우리가 ‘예술 작품’이라고 인식하던 익숙한 것들이 모두 사라진 공간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니 마치 그간 구축해 놓았던 기존의 의식체계가 깨부숴진 것 같았다. 그것은 곧, 우리가 잊고 지냈던 혹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라 쉽게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다.


공동을 유유히 떠도는 자연의 소리와 듬성듬성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공기를 진동시키는 음성, 서로 스칠 때의 미묘한 옷깃의 흔들림, 아늑하게 바닥을 비추고 있는 누르스름한 조명까지, 이것들이 한데 어울려 빚어내는 그 순간의 실재적 체험이 ‘예술 작품’이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그 공동이 우리들의 심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치 깊은 숲 속에서 명상하듯 의식의 찌꺼기들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버려야 할 것들은 휴지통으로 보내 비우기를 눌렀고, 전시가 없을 때의 공동처럼 본연의 나를 상징하는 것들은 수면 위로 올려 보냈다.


다시 한번 편안함을 느꼈다. 전시관을 나와 바깥의 빛을 맞이하자마자 저 깊숙한데서 새싹 돋아나듯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감지하였는데 그때가 돼서야 이 전시의 기획자 중 한 명이 인터뷰 중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공동은 공동이 아니다’를 본 전시의 타이틀로 설정하려 했다고 한다.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렇다. 공동은 늘 채워져 있는 공간이다. 어떤 도로와 어떤 건물은 운송수단과 사무용 책상으로 채워져 있고, 또 다른 곳은 공장용 기계와 가정용 식탁, 주방 기구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그 자리에 있음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실은 저마다의 히스토리와 상호 간 연결고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따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쉽게 깨달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기계적 사고와 반복적 행위에 익숙해진 탓에 ‘가만히 있는’ 혹은 ‘반드시 필요치 않은 무언가에 시간 쓰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되도록 전시를 자주 관람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것들은 정말로 나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망치로 내려치기도 하고 도끼로 찢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도 생각해 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 날의 전시는 리부팅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나의 두 눈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것을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급기야는 새로운 판을 짜게 만들었다. 그 이후에 창조해내는 결과물들은 혁신이든 퇴행이든 ‘색다른 것’ 임에는 틀림없다.


나의 삶이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이 위치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미술관으로 가보길 추천한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에 쏙 드는’ 그 작품 앞에서 가만히 머물러 보기를 함께 추천한다. 변화는 사소한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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