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me, from us 1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onymous Mar 06. 2017

La Faba

예상보다 이른 시각에 그 날의 목적지였던 ‘라 파바’ 마을에 도착했다.


급하게 배낭을 풀고서 샤워를 한 뒤, 포근한 낮잠에 빠졌다.

매일 약 30km씩 걷는 강행군이기에 체력 회복을 위한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거의 침대와 하나가 될락 말락 하려는 찰나, 나를 부르는 소리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고 초반부터 같이 동행하게 된 외국인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라 규모가 아담하고 그나마 자리 한 건물들도 대부분 오래되어 낡은 편이었다. 해가 뉘엿해지는 시점에 우리는 한 식당에 둘러앉아 순례자 메뉴와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그동안 밝히지 못했던 고민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가 이 길을 왜 이토록 고생스럽게 걷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둥, 초중반의 패기와 설렘 같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는 둥. 결국에는 내 꿈과 지향하는 삶까지 도달하여 모자란 영어 실력으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진지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말았는데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죽 늘어놓는 내 말을 끝까지 귀담아듣고는 괜찮다고, 그렇게 흔들리기 위해서 또 고민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것 아니냐며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담담하게 반응했다. 갑작스럽게 야기된 불안함은 가늠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특별했던 여행이 끝나간다는, 이제 곧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고맙게도 친구들의 위로 덕분에 안정을 되찾았다. ‘이래서 그냥 순간을 즐기라고 말하는 건가.’ 싶어 애써 고민들을 붙잡지 않고 그 날만은 흘려보내기로 작심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 주변에 있던 한 바의 테라스에 앉았다. 마을이 작은 편이다 보니 식사를 마친 다른 친구들까지 모두 이 바에 모이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비슷한 또래의 여자는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렀고, 그 옆의 남자는 앉아있던 의자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즉석에서 공연장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모든 사람들이 오밀조밀 가까워졌다. 우리는 급속도로 허름한 바와 그 안에서 따라져 나오는 맥주,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와 어쿠스틱 멜로디, 머리칼을 가볍게 흩트리는 이른 저녁의 선선한 미풍이 어우러지는 정경에 매료되어 함께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바로 방금 전 식당에서의 대화보다 더 부드러웠다. 각자의 그룹이 있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뒤섞여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고, 중후해 보이는 한 외국인 남자는 자신의 아들이 생일을 맞았다며 다 같이 축하 영상을 찍자고 제안했다. 그런 다음 또다시 음악이 흘렀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언어의 인사말과 웃음, 음악들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이른 저녁의 스산한 기운 때문에 자리에 앉아 입고 있던 외투의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리고는 만약 천국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무엇보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너무나 좋았다. 제각기 다른 피부색을 띠고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지만 전혀 거리낌 없이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는 모습들을 보고선 적어도 이 길 위에는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 깊은 감수성과 삶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 현재에 집중할 줄 아는 여유를 닮고 싶었다.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모두 하나같이 서로가 특별한 존재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나 역시 우스갯소리로 말을 하곤 했지만, 정말로 느낀 바가 그러했다.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본가를 떠나 외국에서 독신 생활을 하거나 세계일주를 하거나 언어에 능통하거나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그들 사이에 끼어있으니 한국에서 내가 느꼈던 미묘한 소외감이나 아니꼽게 바라보던 시선들이 싹 잊혔다.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그 당당한 태도는 분명 내가 찾고자 했던 핵심이었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그 머나먼 여정에 올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삶이 ‘그저 또 다른’ 삶으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라 파바’에서의 그 날은, 정말 특별할 것 없이 소소했던 그 시간들은


"앞으로 내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할 때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도록 하는데 충분한 추억이 될 것 같다."

정원이 아름다웠던 어느 마을의 소박한 알베르게.
'LEON'의 시내 주변에 위치한 노천카페. 스페인의 시에스타는 정말 나른하다.
길을 걷다 마주한 수수밭.
이른 새벽 출발할 때의 상쾌한 공기와 적막함은 기분 좋은 설렘과도 같다.
이전 12화 가구를 만들면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