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항상 물건 하나를 오랫동안 사용하셨다.
낡을 대로 낡아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어도, 기어코 한두 번 정도 더 수선하여 마치 새 것인 마냥 부드럽게 다루시곤 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아버지의 차를 타는 빈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어느 날 뒷좌석에 놓여있는 황갈색의 가죽 브리프케이스를 발견하고는 속으로 흠칫했던 적이 있다. 어렴풋한 내 기억을 더듬어 봐도 족히 십몇 년은 더 쓰셨을 것 같은, 그 '때 묻은' 가방이 아직까지 두툼한 서류 뭉치와 카탈로그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 돌아와 급한 대로 여기저기 박혀 있는 가방 개수를 세 보았다.
수납장 위에 안 쓰는 것까지 더하니 눈대중으로 세어 봐도 여섯일곱 개는 돼보였다. 그중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두 개 밖에 되지 않는데 말이다. 나머지 것들은 대체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참 쓸데없는 곳에 많이도 썼구나.’ 한심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개의 가방을 사는 동안, 분명 몇 번이나 손잡이를 새로 달고 구멍 난 부분에 가죽을 덧대고, 떨어진 금속 버튼을 다시 부착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근검절약’, 그것의 근본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끼기 위해서’, 그리고 ‘아낌없이 주기 위해서.’
아마도, 후자의 목적어에 들어갈 객체는 ‘가족’ 일 것이고.
그 날 이후로 나는 쓰고 있던 가방이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운 것이 사고 싶어 질 때, 아버지의 그 브리프케이스를 떠올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굳이 사지 않아도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신, 가끔씩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보이는 빵집을 보고는 ‘빵이나 좀 사갈까’하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빵을 좋아하셨는지 생각해보며 매장 안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아마도 ‘항상 당신의 노고와 희생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보다. 직접 말하면 될 것을 아들은 꼭 이렇게 무뚝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