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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Mar 17. 2017

수영강변에서

센텀시티의 한 백화점에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저녁 9시 20분.

기온은 적당했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꽤나 추운 겨울날이었다. 백화점 정문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집까지 걸어가야겠다는 고독한 감성에 빠져버리고는 이내 이어폰을 두 귀에 꽂았다. 망설임 없이 <라라 랜드>의 사운드 트랙을 선택했다.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에 발걸음은 절로 나른해졌다. 나는 괜히 분위기에 더 취하고 파서 연거푸 한 숨을 푹푹 내쉬며 길게 쭉 뻗은 수영강변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마침 가방도 메고 있었던 터라 배낭여행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불빛을 좇아 걷다가, 문득 강을 기점으로 왼편과 오른편의 풍경이 ‘참 다르게 보여서’ 또다시 깊은 사색에 빠지고 말았다. 오른편, 그러니까 센텀시티의 불빛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세련돼 보였다. 그것들은 영화의 전당, 두 개의 백화점, 50층을 웃도는 신식 고층 아파트들과 어우러져 심지어는 우아하기까지 했다. 반면에 내가 속해 있던 왼편은 연식이 오래된 저층 아파트들과 어스름한 불빛을 머금은 가로등, 작은 창고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순간 내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두 다리는 왼편의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자꾸만 오른편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은 곧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마도, 오른편에서의 삶이 나에게는 저 깊은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하나의 꿈이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발걸음이 느려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종종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인사치레로 집이 어디냐고 물을 때면 되도록 동네 이름까지만 밝히며 굳이 센텀시티에 가깝다고 덧붙여 설명하곤 했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나는 분명 내가 살고 있는 ‘주공아파트’를 마치 절대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될 극비처럼 여겼던 것 같다. 1985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올해로 33살이 되었다. ‘옛날’ 아파트의 전형인 기다란 복도식 구성에 여전히 열쇠로 대문을 여는 방식이다. 대문의 곳곳에는 녹이 슨 자국들이 만연하다. 그나마 나 있는 열쇠 구멍도 많이 닳아버려서 열고 잠글 때 힘을 좀 써야 한다. 은연중에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왜 우리는 이사를 가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있어 보이고 싶은’ 물욕으로 연결되었다.


최근에서야 어머니가 “여기 오래 살았으니 한 번 다른 데로 가보는 건 어떻겠냐.”며 제안하셨고, 나는 부리나케 방문을 닫고서 노트북으로 부동산 관련 정보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맨 처음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친 검색어는 ‘센텀시티’가 접두사처럼 붙어있는 대형 건설사의 프리미엄 아파트 이름이었다. 몇 가지 브랜드를 검색해보고 나서야 나는 여전히 그곳들이 꿈의 공간이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재건축 계획 발표로 인해 집값이 많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영강변의 오른편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또다시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산책로의 끝에 가까워졌을 때쯤, 늘 그랬듯 나는 스스로 맹세했다. 그냥 열심히 살아보자고. 오른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나 자신에게 있기에. 안타깝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이십 대의 한 자락에서 쉬지 않고 다양한 창작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먼저 행복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우리 가족이 보다 ‘여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당장 취업을 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힘들어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길이 끝나기 전에 오른편의 고층 아파트 중 유난히 불빛이 밝은 어느 한 집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어머니가 편안하게 저녁을 준비하고, 아버지와 뉴스를 보며 담소를 나누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흐뭇했다. 여태 속아왔지만, 나는 그 날이 꼭 올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 한번 속는 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 산책로로 접어들 무렵 그랬던 것처럼 깊게 후- 숨을 내뱉으며 메고 있던 가방끈을 두 손으로 꼭 잡아당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짧은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일상의 공간을 홀로 지나치다 보면 가끔씩 그 풍경이 굉장히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그 날의 수영강변이 그러했다. 쭉 뻗은 길과 은은하게 빛나는 가로등, 내면으로 스며드는 <라라 랜드>의 Mia & Sebastian's Theme 주제곡,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줄기. 이 모든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사색에 빠지도록 인도하였고,

그것들이 늘 그 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나 역시 요동치는 마음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왠지 앞으로도 나는 종종 이 길 위에 머무르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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