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onymous Mar 28. 2017

투표

이 사회가 어떤 원리로 보존되는지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형체 없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은 배제하고 싶지만, 지금의 부패 속도라면 ‘디스토피아 한국’은 그리 머지않은 것 같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 속 2020년의 절망적인 영국이 떠오르는 것은 괜한 비약일까.


사실 나는 정치에 대해 무지한 편이고 그동안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적도 없었다. 물론 꾸준히 뉴스와 신문을 챙겨보고 시사 예능 프로그램도 흥미롭게 보는 편이며 나름대로 정치적 이념과 그에 따른 가치 판단도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인데 그 말은 곧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 임을 언젠가부터 망각했음을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왜 여태 그 권력을 가진 주체로 자기 인식하지 못했던 것인가.


대부분 알다시피 권력과 재력은 이미 양극화의 늪에 빠진 지 오래다. 파레토 법칙처럼 이십 퍼센트가 팔십 퍼센트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이 괴이한 구조는 단시간에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째 힘든 사람들은 더 힘들어지고, 버는 사람들은 더 버는 것만 같다. 기분 탓인가.


우리나라 사회 구조의 더디다 못해 거의 정체되다시피 한 변혁의 속도는 ‘정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어느 순간 아주 불쾌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내놓는 소위 '국민을 위한 정책' 중 다수가 사회의 이 곳 저곳을 거쳐 내려와 아주 미소하게 나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자료 혹은 예를 들어 설명할 순 없지만, 행주 짜듯 그나마 남은 물기마저도 탈탈 털어가는 것 같은 그 퍽퍽한 기분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알고는 있다. 저소득층, 서민층, 중산층부터 상위 계층까지 모두 ‘대한민국 국민’ 임에는 틀림없다. 특정 계층과 사회적 지위에 유리한 정책만 입법 및 발효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불공평’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기업과 그 기업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주체들 혹은 고위 공직자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아주 교묘히 정책들을 재배열한다고 보는 불신은 진정 한 개인의 억측일 뿐일까.


만약 억측이라면, 다시 말해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런 억측을 삭제하고 싶다면,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한다. 사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평상시 주변에 ‘정치는 정말 중요하다.’,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투표를 꼭 해야만 한다.’며 설파하고 다녔지만, 정작 대통령 선거를 빼놓고는 이렇다 할 선거에 참여했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제 막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청년이 있다면 비슷한 종류의 부끄러움은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보수’와 ‘진보’로 편을 갈라 어느 쪽이 더 나은 이념 집단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소중한 한 표를 던지려고 하는 대상이 진실로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할 만한 강직함을 갖추고 있는지 먼저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각자 이 사회가 나아가길 원하는 방향, 그것들에 부합하는 정치 활동의 실행이 가능한 후보자를 잘 가려내길 바란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각자의 이념은 아주 다양하다. 그 모든 차이를 포용할 수 있는 대표자를 뽑기란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손에 쥔 한 표를 단순히 숫자와 색깔만 보고 휙- 던져버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비틀어진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가장 신속하고 공정한 방법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Jame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