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오전,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 <신혼일기>라는 예능을 보게 되었다.
안재현과 구혜선의 결혼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는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들을 보며 일종의 흐뭇함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필시 거짓 없는 관계에서만 발현되는 편안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대중들은 타 방송국의 가상 결혼 예능 프로그램과 ‘신혼일기’를 비교하며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고 평했다. 실은 나도 그렇게 느꼈다. ‘진짜’ 관계가 머금은 ‘진짜’ 감정들은 분명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나눌 때와 똑같은 그것이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시골집의 거실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들이 가진 직업의 특수성과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것만 같아 괜히 내 마음이 다 고요해진다. 연예인으로서의 피상적 존재 대신 그저 평범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한 연인의 대상으로 조명되는 순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처럼 소탈함이 묻어 나온다. 우리는 어느새 안재현과 구혜선이 되고 만다.
또 하나 마음을 끄는 것이 있다면, 바로 ‘현실’이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완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때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때가 있을 것이고, 표현하는 때가 있으면 묵시하는 때도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부정적인 것들을 거부하려는 습성이 있다. 어떤 경우엔 상대방과의 과거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겨지길 바라는 편집적인 왜곡을 되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한 가득 쌓인 눈처럼 차분한 사운드와 느릿한 영상은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품는다. 멀찍이 떨어져 관조한다. 그 속에서 그들은 사소한 문제로 언쟁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쓸데없는 자존심 지키기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을 잇달아 보고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가 않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미 '연인 관계'가 가지는 여럿 의미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적 다툼이 마냥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찌 됐건 이러한 ‘현실’은 곧바로 이어지는 이해의 시간들 덕분에 한층 더 견고해진다.
한바탕 자신의 감정을 후드득 쏟아낸 후에, 다시 천천히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혹은 어떠한 이유로 인해 화가 난 것인지를 침착하게 설명하면서, 이번에는 배려와 존중의 과정이 자연스레 진행된다. 성숙한 관계는 이러한 과정들이 겹겹이 퇴적되고, 굳어진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모든 인내의 시간들이 우리들의 사랑과 합치됨을 경험한 이상, 화면에서 눈을 떼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흩트려져 있던 감정의 먼지들을 툭툭 쓸어낸 다음, 소소한 저녁상을 함께 차려 먹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안재현과 구혜선이 사라지고 ‘그 사람’과 단 둘이 함께 했던 저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에, 잊고 있었던 사랑의 감정을 상기시켜 준 두 사람의 ‘신혼일기’가 새삼 고마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