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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Nov 09. 2016

about MOVIE_몽상가들

세 명의 청춘, 그리고 혁명

몇 년 전, 어디선가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영화의 내용이 너무나 난해하고 무질서하다고 느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무질서한 것은 나였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말하자면 어느 정도 스스로의 가치관과 사상적 방향이 정립된 이후에 이 영화를 보고(바로 어제) 그 깊은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 자체가 행위였고, 그 행위는 다분히 투쟁적인 혁명이었다. 사실 아직까지 100% 완벽히 이해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는 지적 수준과 학문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예의범절과 질서 정연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대한민국의 대중으로서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섹슈얼한 장면들과 키치함을 넘어서는 청춘들의 비상식적이고 기이한 행동들을 영화적 특성에 물들여 보여주는 게 절대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물론, 고혹적인 에바그린의 몸매와 핏기가 감도는 마이클 피트의 입술, 곱슬머리까지 섹시해 보이는 지적 이미지의 루이스 가렐이 만들어내는 삼중 합주는 단연 필름으로서의 낭만과 매력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테오'역의 루이스 가렐

하지만, 메타포적인 요소를 덧입혀 감상하다 보면 숨은 메시지와 주제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읽어 들일 수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68년 파리인데 당시 현지에서는 기존 권위주의와 보수체제에 대한 저항, 베트남전 반대, 남녀평등 및 여성해방, 히피 운동, 신 문화예술 전파 등과 같이 굉장히 광범위하고 공격적인 혁명이 일어난 때다. '68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회운동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었고, 이후 다른 국가로 확산되어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한 리뷰 게시글의 내용을 토대로 하면, 미국에서 건너온 주인공 매튜(마이클 피트)는 신문화와 혁신을 갈망하는 '대중'을 의미하며 쌍둥이 중 남자인 테오(루이스 가렐)는 모더니즘 사상, 여자인 이사벨(에바 그린)은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을 상징한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전반적인 스토리를 해석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말인즉슨, 본래 진보적 성향의 발현으로 형성된 모더니즘이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권력과 질서, 보수적 체제의 밑바탕으로 '자리 잡게'된 현재에 저항하기 위해 또 다른 진보적 사상인 포스트 모더니즘이 대두하게 되고 그것이 새로움을 요구하는 대중과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스파크 같은 것들을 세 명의 남녀 주인공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부모'는 기존 체제와 권위를 상징, 세 명의 주인공은 그에 반하는 '진보'와 '혁명'의 주체가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사벨이 가장 중요한 역할인 것은 분명하다. 초중반부에는 테오와의 관계가 부각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매튜와의 관계에서 '일반적인'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더없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존재로 변모한다. 즉, 어떠한 기존 사상으로부터 괴리되어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자리 잡아가는 과정은 다분히 폭력적이고, 투쟁적이고, 또 혁명적이다. 넥스트 제너레이션으로 도래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긴 시간들을 개별적인 인간들의 감정과 심리상태에 대입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상업영화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불편하고 거북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화 자체가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질서함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나아가서 정말로 그것이 왜 인간사회에 필요한지를 스스로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세 명의 청춘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뛰어다니는 장면은 보고 있는 사람마저도 쾌감에 젖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실존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장 자극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 명의 청춘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 가질 수 있는 의미와 후속적 영향들에 대해서 매우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판과 논쟁은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쳐버리면 한 시대를 아우르는 패러다임은 탄생하지 못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 행위인데 때때로 그것은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다.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진행되는 것이 바로 '혁명'이고, 아래로부터의 권력 형성인 것이다.

그들이 영화의 한 장면을 실제 현실에서 모사하는 행위라든지 영화로 비롯되는 예술을 탄압하는 현 정부와 시스템의 통제를 거부하고 '시네마테크'라는 고유한 예술적 공간을 살리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들은 현대 사회의 젊은이들에게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나 역시도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어떤 것이 진정한 삶'인지는 알지만 실천과 행동에서 미약했던 그 움직임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유사한 표현으로, 어떠한 용기와 끓어오르는 열정을 환기시켰다고 볼 수도 있겠다.


방관자적 입장에서 혁명의 적극적 참여자로 거듭나는 마지막 장면

애석하게도 그렇게 맞서 싸워 쟁취한 자유와 신사상, 신문화, 신예술이 어느 순간 이전과 동일한 형태로 또 하나의 질서와 체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회'와 '구조'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순환이 계속된다. 아래로부터 유래한 권력은 또 어느 순간(팔레트 법칙과 같이) 20%의 기득권 세력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절대권력으로 변질된다.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법칙이고 진리라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움직임과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누군가는 타자화 되고 누군가는 주체화되어 평범과 비범을 경계 지을 뿐이다. 어느 그룹에 속할지는 우리들의 선택이고 몫이다.

현대 사회는 실시간으로 넘쳐흐르는 정보의 홍수와도 같다. 자신만의 올바른 가치판단과 사고를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미디어와 매체들의 '말과 글'에 쉽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더 격렬하게 의심하고, 사색하고, 비판해야 한다. 여담이지만, 흔히 비난과 비판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정말이지 다른 속성의 어휘이다. 비난만 지속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이지만 반대로 비판을 즐겨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운명과 방향을 보다 더 나은 쪽으로 이끌 수 있는 이타주의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토대로 최대한 다수의 합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처럼 어수선한 시국에는 청춘들이 더 분노해야만 한다.

당연히 방식은 MENTALLY 그리고 CRIT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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