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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Apr 14. 2022

공상이 현실이 되었다.

일기 연대기 [지구야 미안해]

일시: 1991년 5월

장소: 대한민국 대전

날씨: 5월의 맑고 더운 날, 바람이 필요하다.

제목: 공상과학그림 그리기 대회



햇빛이 쨍한 오월의 어느 날이다. 오늘은 학교에서 "공상과학그림 그리기"와 "미래상상 그리기" 대회를 한다고 한다. 나에게 미래상상 그리기는 늘 우주였다. 1학년 때도 우주, 2학년 때도 우주, 3학년 때도 우주. 나는 이제 고학년이다. 무려 4학년이나 돼서 또 우주를 그리자니 변화를 주고 싶다. 잠시 고민을 하다 기발한 생각이 난다. 흰 도화지에 조심스레 연필을 갖다 댄다. 힐끗 옆을 보니 짝꿍 재영이도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우리의 그림을 그려두셨다. 각자 소개할 시간을 3분씩 준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그림을 든 채 교탁 앞에 나와 간략한 소개를 한다.

"하루 여행~"

"네!"

내 차례다.



"이 그림은 미래의 한 모습입니다. 제가 그린 이 공원은 같은 곳이지만, 각각의 문을 열면 여기는 봄, 여기는 여름, 여기는 가을, 여기는 겨울. 이렇게 각각의 계절을 전부 누릴 수 있는 신기한 공간입니다."

"이런 그림을 그린 계기가 있나요?"

"네. 저는 겨울이 좋기도 하지만 싫습니다. 추위를 너무 많이 타거든요. 하지만 제 동생은 여름이 덥다고 싫어합니다. 각자 같은 공간에 살더라도 자신이 살고 싶은 계절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곧이어 재영이의 차례가 되었다. 재영이는 사람들 입에 입마개를 잔뜩 씌워놓았다. '아니, 사람들이 다 개가 되었나 웬 입마개야?' 속으로 생각하던 차에 재영이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저는 바이러스로 침략당한 미래의 모습을 상상 그리기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입마개를 하고 다녀야 하고, 심할 경우 우주인처럼 옷과 장비를 갖추고 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야야! 말이 되냐? 아무리 상상이지만 그건 너무 심하잖아!"

"우우우우~~!!"

아이들의 야유가 시작되었다.



야유를 뒤로하고 웬일인지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된 재영이의 그림이 꼭 실제 같아 한참을 쳐다보았다. 코와 입이 보이지 않아 눈만 그려놓은 그 모습들을.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 모습들을. 재영이가 그려놓은 거미 같은 바이러스의 모습들을 말이다.


일시: 2009년 10월

장소: 미국 오레곤주

날씨: 파란색과 초록색이 분명한 10월의 어느 날

제목: 푸르다는 말은 여기엔 없다.



푸르뎅뎅하다. 푸르스름하다. 푸르다.

내게는 파란색이나 초록색이나 경계가 없었다. 산도 푸르다고 했고, 바다도 푸르다고 했고, 잔디도 푸르다고 했고, 하늘도 푸르다고 했다.


이곳에 오니 왜 초록과 파랑이 다른지, 왜 green과 blue가 완벽히 다른 색이라 푸르뎅뎅하다로 겹쳐지지 않는지 완벽히 알게 되었다. 하늘이 파랗다. 이건 푸르다고 할 수가 없다. 잔디가 푸르다. 이건 파랗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왜 이곳에서 선글라스를 껴야만 하는지 알 것 같다.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다. 해룰 마주하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날짜: 2009년 12월

장소: 미국 오레곤 주

날씨: 해가 나다 흐리다 비가 오다 우박이 내리다 진눈깨비가 내리다 비가 오던 날

제목: Oh! Yeah! You have four seasons in a day.



해가 났다.

곧 흐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바람막이 옷의 모자를 걸쳐 쓴다.

간혹 우산을 쓴 사람들이 보이면 뒤이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Californian~s!!!!" 하면서.

Californian이 아니기 위하여도 갖고 있는 우산을 꺼내지 않던 차에 소리가 심상찮다.



두두두두.

우박이다.

엄지손톱 만한 우박이 눈앞에서 우두두 떨어진다.

"What the heck?" 웅성이며 아이들은 실내에 피신한다.



곧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나고,

눈앞에 말도 안 되는 쌍무지개가 뜬다.



이것이야말로 내게는 "What the heck!이다." 하는 순간

"Oh. Yeah. You have four seasons in a day. That happens here. " 하는 친구의 소리가 들린다.



진정 왓더헥인 날이었다. 하루에 사 계절이 모두 있던 날.

그렇게 갑자기 1991년 4학년, 내가 그린 그림이 생각나던 그런 날이 오늘이었다.





날짜: 2019년 1월 15일

장소: 대한민국 서울

날씨: 미세먼지로 두통이 오던 날

제목: 머리가 아프다. 지구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말 그대로 머리가 아프다.

이런 공기에서, 내가 살아야 함은.

그동안 의식하지 못 만 채, 자연과 상생하지 않고, 지낸 나를 포함한 이 지구 상 모든 어른들이 만들어 낸 시간들의 결과라 생각하여. 결코! 원하지는 않지만 달게 받는다 손 친다.



그러나.

우리 작은 아이들이 살아갈 이 세상에.

이따위 공기를 물려줘야 한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이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반겼는데.

그렇게 반긴 귀한 손님들이.

하늘색을 회색으로 칠하게 된 지금.

작은 아이들 모두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결국은 근본적인 건 범 세계적인 국가 간 정책적으로 풀어나가야겠지만, 과연 지금 내가 행하는 재활용, 일회용품 자제 등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싶다가도, 이 작은 것들이 모여 쌓인다면 어떻게든 좋아지겠지 하며 바라고 바라며 짊어지고 간다.



원래 무언가를 부러워하거나 갈망하는 성향이 아니라 내 상황에 감사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런데, 앞으로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니 갑자기 숨이 막혀온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행해지는 두려움과 죄책감, 씁쓸함, 분노, 걱정, 속상함, 아이들에 대한 미 안 함 등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창문 꼭꼭 닫고도 미세먼지가 올라가는 공기청정기만 답 없이 쳐다만 본다.

며칠 전 찾아본 예전의 사진들.

과연 우리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들어 마음껏 쏟아지는 햇살을 즐기는 날들이, 과연 또 올까!





날짜: 2021년 10월

장소: 대한민국 서울

날씨: 코로나로 자가격리 중인 날, 날씨의 개념을 잃었다.

제목: 공상이 현실이 되었다.



국민학교 4학년, 재영이가 그린 그림에서 사람들은 모두 입마개를 하고 다녔다. 거미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그는 말했다. 하마터면 우주복을 그릴 뻔했다고. 입마개에서 그쳤을 뿐이라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가 왔다.

아이들은 마스크 벗은 모습이 발가벗은 모습 같다고 말한다. 줌 수업을 해도 마스크를 쓴다. 맨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었다.



그림이 현실이 되었다.



공상과학 그리기 대회의 그림이 공상이 아닌 현실이 됨을! 소스라치게 두렵던 어느 날, 자가격리 중인 우리 집은 집 안에서도 빌어먹을 입마개를 하고 있고, 서로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 밖에 없었다.





날짜: 2022년 4 14일 목요일

장소: 대한민국 서울

날씨: 어제까지 여름이었지만 오늘은 겨울인 날

제목: 패딩 안 집어넣길 잘했지.



이봐. 신랑.

맨날 나보고 정리 좀 하고 살라고 잔소리했지.

필요한 패딩 딱 꺼낼 수 있는 이런 날이 온다.

춥잖아.

이렇게 미리미리 겨울 옷 정리 안 한 것이 좋을 때도 있는 거야.

말해놓고 나니 심히 걱정이 된다.



날씨가 왜 이러나. 지구가 정말 힘들구나.

나라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지고, 지구에게는 한없이 미안하고, 아이들에게도 끊임없는 책임감을 느끼며 오늘을 산다.



재활용을 깨끗이 씻어 내어놓으며, 반짝이는 플라스틱을 내려놓으며.... 이 작은 손길에서 조금이라도 지구를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본다.



깜깜한 우주에서 눈부신 파란빛을 내며 돌고 있을 지구에게, 마음 가득 미안함을 보내며, 작게나마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본다.



이제는.... 왓더헥 외치며 하루에 사계절이 다 있다 농담을 할 수도, 공상과학 그리기라며 입마개를 그리는 상상을 펼칠 수도 없게 되어버린 무겁디 무거운 현실이 가슴을 짓누른다.



"커피는 텀블러에 넣어주세요."

그렇게 내가 방금 전 한 작은 실천으로 조금이라도 지구가 숨 쉴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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