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하며
필사를 시작했다. 오랜만이다. 책을 하나하나 손으로 눌러쓴다는 것이 주는 기쁨이 좋다. 외람된 상상을 해본다.
'나는 지금 이 책의 작가야.'
한 글자 한 글자 나의 눈을 통해 심장을 통해 손 끝을 통과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필체로 글이 쓰여진다. 작가는 이 문장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손이 주는 느림을 견디지 못해 늘 자판 앞에 앉던 나였다. 필사를 시작할 때도 자꾸만 더 빨리 더 많이 쓰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드디어 손이 주는 느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시간을 더 들여 공들여 쓸 수 있게 되었다. 한 글자가 글자로 쓰여지는 동안에 마음이 그 문장과 머물고 싶어 시간을 끌었다. 글자가 완성될 즈음이면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이런 과정 하나 없이 나는 쓰고 싶었구나. 간절했다 느꼈던 모든 것들은 어쩌면 그저 향유였는지도. 어쩌면 쓰지 않으면 안 되었고 빼내지 않으면 살 수 없던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필사 노트를 덮을 때면 생각한다.
'괜찮다. 나만의 속도로 가면 된다.
괜찮다. 나는 쓸 수 있다.
괜찮다. 여전히 나는 가면 된다.
다양한 길과 방법으로 내가 갈 길을 간다.'
필사 노트에 적힌 글자는 나의 필체. 거기에 담긴 문장은 저자의 문장. 그러나, 필사 노트 안에 담긴 문장은 실제로는 나의 심장을 담갔다 나온 문장들. 그 문장들로 채워질 나를 기대한다.
천천히, 심장에 오래도록 담갔다 건져 올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