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자를 좋아한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 소화력이 좋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앉은자리에서 피자 한 판을 혼자 다 먹을 수가 있는 괴력을 자랑한다. 사실 피자뿐만 아니라 밖에서 먹는 모든 것이 다 맛있었다. 대학교 때 학생회관에서 먹는 식판 밥이 너무나 맛이 있어 연신 '세상에! 이렇게나 맛있을 수 있다니.'를 외치며, 식판을 삭삭 긁어먹곤 하였는데, 당시 남자 친구였던 신랑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런 작은 체구에서 저런 먹성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당시 과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며, '이건 지금 맛이 없는 건데, 입맛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며 분개한 적도 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자라면서 피자 라지 사이즈 한판을 시키면 네 식구가 먹기 부족하게 되었다. 워낙에 소식하고 피자를 즐겨 찾지 않는 신랑은 자동적으로 늘 양보하게 되었고, 아이들이 자신의 양을 미리 확보해두기 시작하자, 쿨하게 양보하는 신랑과 대비되어 구걸하듯 피자를 먹고 있는 나의 모습이 그제야 보인다. 이제 와서 이 나이에 피자 한 조각이 뭐라고, 아이들 좀 주지 그토록이나 먹고 싶은 욕구를 누르는 나의 모습이 볼썽사납다. 애써 안 보면 괜찮을 거라고 잠시 식탁에서 자리를 피해 냉장고 옆 노트북 책상으로 옮겨 앉는다.
쓰고 싶은 글감은 쌓여만 갔다. 어떤 때는 핸드폰 메모장에, 어떤 때는 수첩에, 메모장에 산재해 적힌 글감들은 정리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가고, 입안 가득 피자 한 조각을 오래도록 씹으며 어느 소재를 잡을까 고민을 한다. 무슨 글감을 잡던, 곧 아이들이 피자를 다 먹을 테고, 그러면 나는 다시 이 자리에 앉지 못할터인데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그 찰나가 아쉬워 한 줄이라도 남긴다며 자판을 두드린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유독 눈치 보인다. 이 시간에 설거지를 하던, 어질러진 집을 치우던 해야 할 것 같은데,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이 무언가 죄스럽게 느껴진다. '이럴 때 책 한 권이라도 낸 작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조금 덜 눈치가 보이지 않을까? 뭐가 그리 쓰고 싶다고, 그 틈새에 이토록이나 써대는 것일까.
이런 나의 공격을 받아가며, 내가 남기고 팠던 조각조각의 글들이 안쓰러워 나 스스로라도 '잘했어. 언젠가는 구덩이에 있는 이 글들이 나올 날이 있을 거야'하고 응원해 주기도 한다. 나의 처지가 처량해서 나 스스로라도 '괜찮아. 오십이 넘어 책 하나 내도 되지 뭐.' 하며 토닥여 준다.
"급하게 갈 필요 없어. 차근차근 천천히 가면 되지. 그렇게 네가 늦게 할수록 너와 비슷한 처지의 뒤늦게 꿈이 생긴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 될 수 있는 거야."
나는 애써 속삭인다. 내게 글은 언어와 같다. 표현을 하는 수단, 필수적인 것이다.
매일 쓰는 글은 선물이기에, 나 자신과 대화하는 기쁨을 알기에, 산만한 나의 일상을 뚫고 한 줄 한 줄 나의 호흡을 찾아갈 수 있음에,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들이 피자를 먹느라 정신이 팔린 짧은 찰나에 단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나중에 언젠가는 뒤이어 쓸 수 있겠지 희망하며, 고요하고 오롯한 시간은 사치임을 몸서리치며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그만 먹을래!'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뒤에 들리고, 나는 애써 다 씹어 삼킨 피자에 뒤이어 아이들이 남긴 피자 한 조각을 맛있게 먹는다. 앞으로는 피자를 두 판을 시켜야겠다면서... 패밀리 사이즈 피자는 없어진 건가? 라지 사이즈는 너무 작다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