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 던져진 무지갯빛 물방울

아이가 들려주는 무모하고 아름다운 상상 이야기

by 고요

색을 상상한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들을 좋아하던 유년시절을 지나, 언제부터인가 무채색만 찾던 길고 긴 십 대, 이십 대를 지나, 다시 아기를 낳고 찾은 알록달록의 삼십 대, 그리고 찾아온 사십 대인 나에게 '색'이란 어떤 의미일까?


현재 나의 앞에는 회색 의자, 베이지색 식탁, 하얀 벽지, 그리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이 걸려있다. 화려한 색을 입은 공간이라고는 아이들의 사진과 아이들의 물건뿐이다. 그리고, 그 색색의 물건들이 가득 채워진 공간이 바로 우리 집이다.


툭.

발끝에 무언가 걸린다. 식탁에 앉아있던 나는 A4지 종이 한 장을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으로 꼬집에 집어 올린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서 색칠해온 포켓몬스터 그림이다. 그림을 가만히 응시한다.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상상 속 노랫소리는 나를 상상의 나라로 보낸다.


연휴 마지막 날, 둘째 아이가 이야기해주었다.

"엄마, 내가 지금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어."

"어떤 상상인데?"

"그건 비밀이야."

그러나, 본인 스스로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이내 종알 종알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집이었다.


아이가 이야기해준 멋진 집.

좋은 생각을 하느라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

그 이야기를 하면 새어나갈까 봐 조심스레 옴 쌀 달싹 하지 못하던 입.

행복에 젖어 미소 짓던 얼굴.

얼굴에서 시작하여 잔잔히 온몸으로 퍼지는 설렘의 전율.

나의 아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놀랍다. 아무 조건 없이 단지 하나의 '소망'만으로도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밀어 넣는다.


일곱 살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지었다. 그 집은 너무나 커서 바다를 끼고 있고, 바닷속에서는 물고기와 함께 수영을 할 수 있었다. 그 집은 너무나 즐거움이 가득해서, 에버랜드와 워터파크도 안고 있었다. 포켓몬 파크도 새롭게 지었는데 무려 포켓 스톱을 백개나 만들었단다. 그 집은 너무나 가족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해서 가족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기 누나를 위한 커다란 트램펄린, 엄마를 위한 거대한 도서관, 아빠의 흰머리 염색을 위한 이발소까지. 그 집은 너무나 커서 도로를 지어야 했다. 고가도로가 멋지게 엉켜 나있는 집, 집의 구석구석을 다니기 위해 멋진 스포츠카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여기에 핫팩을 갖다 둘게."

그 말이 너무 뚱딴지같아서 다시 물었다.

"핫팩? 왜?"

아이는 빙그레 웃는다.

"엄마 배 아플 때 해주려고!"


나는 추석 연휴에 끔찍한 생리통으로 고생을 했고 약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아 핫팩을 끼고 지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가 마지막에 건넨 한마디였다. 핫팩의 유무는 멋진 집을 짓는데 상당히 뚱딴지같은 이야기이지만, 엄마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엄마가 아플 때 도움을 주고 싶었던 아이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 마음은 무지갯빛을 닮았다. 방금 전 식탁 아래에서 찾은 아이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색을 모두 가져다 한 공간에 모아놓은 마음이었다.


나의 마음속에 그 무지개 빛깔이 가득 찬다. 오로지 아이만이 채워줄 수 있는 아름답고 무모한 상상의 나라, 그 멋진 이야기 한편에는 늘 가족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엄마를 향한 사랑이 있었다.


어둡고 깊은 심연, 그것이 아마도 나의 색이었을 것이라. 그 심연에 무지개 빛깔 한 조각이 톡. 떨어진다. 잔잔히 동심원을 그리며 무지개 색 물방울이 색을 입힌다. 색이 없던 연못에 아름다운 빛깔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못은 이내 무지갯빛 호수가 되었다.


행복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그것은 흡사 좋은 생각을 하던 아들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 감출 수 없이 행복이 새어 나와 얼굴에 퍼지던 그 웃음을 닮았다.


© jordanmcdonald,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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