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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Oct 20. 2022

 이상하게 설레는 교과서 속 영문법 나라

'교과서가 제일 좋았어요'라는 재수 없는 말 안에는...

나이가 드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결코 입밖에 내지 못해 비밀스러운 말들이 더 이상 아무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어떤 사실이 내게 필요 없어질 때,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나는 당시 수능 영어 만점자였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말은 우습게도 내가 영어 교과서를 정말 좋아했던 소녀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시험과 실력은 별도다, 교과서 속 문장은 인위적이라 실용적이지 않다 등의 말들을 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 교과서조차도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교과서와 영문법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나는 스스로 느끼기에 '소수자'에 속했다. 심지어 GTM(Grammar Translation Method) 방식의 text도 '명료하다'는 이유로 사랑했다. "I am a boy. You are a girl."의 문장이 실제 영어에서 그다지 쓰이지 않는 구문, 즉 구문을 위한 인위적인 작문이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바보스러운 말이 짧고 직관적이고 무엇이든 적용해 넣을 수 있는 만능 문구 치고 좀 짱이었다는 사실이었을 뿐...

언제더라, 학교에서 가정법을 배울 때 과거형 were를 쓴다고 배웠다. If I were a bird, ~~(만약 내가 새라면) 구문이다. 여기에는 가정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 불가능한 것들에서'라는 조항이 붙는다. 

I was 도 아니고 I were라니 정말 바보 같지 아니한가? 게다가 발음도 [이f 아이 월 어~] 이니 이응이 많이 들어간 한국어 발음처럼 아기가 웅얼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실이 실없이 느껴져서 수업 중, 끝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 너 왜 웃어?' 하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조차 할 수도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예문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위안을 얻곤 했다. 

왠지 바보 같은 If I were 어쩌고를 해도 실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 될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할 때는 문법적으로도 정말 되지도 않는 말을 쓰는 것이 주는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실제 이렇게 이상한 듯 뭔가 잘못된 듯싶은 것들이 관용화 된 것에서 '삶'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살이 다 비슷하구나.', '어차피 되지 못할 거 상상이나 할 때는 내 멋대로 하자.' 

뭐 이런 반항심 같은 마음까지도 투영되어 문법을 배우는 짜릿한 쾌감도 있었다.

"삼각함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공식과 등식들에서 나는 위안을 찾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그 정리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직각을 포함한 세 개의 점이 가진 성격을 언제나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내가 아는 물리학은 모두 폐철 처리장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곳에서 배운 물리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웠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물리의 세계에서는 삶의 여러 차원을 정의하고 포착할 수 있는 원칙이 있었다. 어쩌면 현실이 모두 변화무쌍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현실도 설명과 예측이 가능할지 몰랐다. 어쩌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배움의 발견, 202쪽>

내게는 언어라는 나라의 법이 주는 안정감이 분명 존재했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접할 때,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 ' 이 나라 법은 이러합니다. 이런 것은 지키셔야 하고, 이런 것은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변해서 큰일 나요. 이런 건 안 지키면 그만이긴 하지만 문화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하는 법과 규칙을 누군가에게서 미리 안내받고 준비된 자세로 임할 수 있었다. 

물론, 살아가면서 부딪히며 체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극 소심하고 불안을 회피하는 성향의 사람이었던 나에게는  '다들 이렇게 하니까 나도 해야 되나 보다.'며 스스로 알아가는 불확실함과 확실함 사이의 불안함이 너무 컸다. 차라리, 아예 '법. 몇 조 몇 항에 이렇게 하라 쓰여있으니 지켜라.' 고 말해주는 걸 선호했다. 그레이 한 영역들은 결국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회에서도 언어에서도 과학에서든. 하지만,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는 게 안정감과 위로를 주었고, 그렇기에 영문법이 싫지 않았다.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는 EFL 환경이므로, 모국어와는 다를 수밖에 없음 또한 쿨하게 인정한다. 7080 그 시절에도 영어 과목은 문법을 위한 문법이다, 시험을 위한 영어다, 실제 사용과 괴리감이 있다는 오명을 듣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영문법은 설렘이자 위로였고, 심지어 응원의 영역이었다. 무엇하나 잘하는 것 없어 돌연변이 같던 나에게 단 한 과목이라도 이런 과목이 존재하다는 사실이 감사하던 학창 시절이었다.

'까지껏, 시험을 위한 영어면 어때. 안 쓰면 그만이지.'

이런 어이없는 마음이 작동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저 순수하게 좋아서 커다란 문법책을 성경책처럼 모시고 들고 다녔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의 영문법이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실제 입시와 실 영어와 얼마 만큼의 거리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즐겁고 좋다면야, 괴리감을 엄청난 시행착오를 향후 겪더라도, 기꺼이 겪을 것이고 기어코 강을 건널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고 각자가 맞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모두가 필연적으로 겪는 시행착오의 구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건너뛰고는 결코 편하게 공짜로 강을 건널 수는 없을 테니까. 뚫고 나간 그 힘은 '쓸데없다.'는 말로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저력이 될 테니까 말이다.


© sharonmccutcheo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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