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여행 Oct 25. 2022

누가 흐린 날은 우울하다 했던가

너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었지.


사람들은 흔히 날씨에 빗대어 마음을 표현하곤 한다. 맑고 해가 쨍 한 날은 밝은 마음을,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은 우울한 마음을. 아홉 살 첫째 아이와 함께 보던 잡지에는 모네의 <루앙 대성당>,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칸딘스키의 <노를 젓다>의 네 가지 그림이 담겨 있었다. "어느 것이 가장 좋아?" 묻자, 아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네의 <루앙 대성당>을 골랐다.

다른 그림들에 비해 모네의 <루앙 대성당>은 채도가 몹시 낮고 색감이 흐렸다. 느낌이 우중충하다. 아이가 흔히 골라 그리는 밝은 원색톤의 색들을 생각하면 이 그림을 선택한 것이 의아했다. 그렇게 걱정은 갑작스레 나를 찾아왔다.

"혹시라도 아이의 마음에 우울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마음에 힘든 일들을 담아둔 것은 아닐까? 왜 저토록이나 밝은 그림들을 놔두고 단숨에 이 그림을 골랐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왜 이 그림이 좋아?"

아이는 반짝 웃으며 아득한 상상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코를 큼큼거리더니 대답을 한다.

"엄마, 나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잔뜩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생각났어. 나는 비 오는 날 냄새를 참 좋아해. 축축한 공기도 좋고 비가 풀에 닿는 냄새도 정말이지 너무 좋아. 흐린 날은 왠지 비가 내려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마음이 설레. "

아이는 곧 한마디 덧붙인 후, 씩 한번 웃고 자리를 떴다.

"흐린 날은 어떤 흥미진진한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래서 더 좋아. " 


그렇다. 우리 첫째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잔뜩 비가 내리고 그치자마자, 1층인 우리 집 창문을 활짝 열고 갓 내린 비의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한다. 자가 격리 기간 중 밖에 나가지 못하는 동안, 아이는 흐린 날씨를 특히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날이 맑은 날은 왠지 억울함이 밀려온다고 눈물을 보였던 아이였다. 놀이터 바로 앞 1층에 사는 아이가 창문을 열면 뛰노는 친구들이 보인다. 정작 본인은 나갈 수 없는데 창문 밖을 바라보았던 아이의 속마음은 오죽했을까!

그런 아이에게 흐린 날은 위로였다. 비가 내리고 아이가 사랑하는 축축한 비의 냄새와 축축해진 풀 내음을 맡으며 온 몸으로 날씨를 반겨주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선 채, 그동안 내가 가져온 생각이 얼마나 편견이었는가를 깨닫는다. 짧은 순간 내가 했던 걱정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아이가 이야기 한 "비가 풀에 닿는 냄새"가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알았지만, 아홉 살 녀석이 과연 비와 흐림의 냄새를 이토록이나 마음 가득 아껴 아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을 전해 들으면서 내가 해왔던 걱정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경우를 경험한다. 사소한 것에 미리 걱정하고 체념하고 스트레스받는 어미에게 이런 순간들은 소중하다. 내가 하고 있는 아이에 대한 걱정들이 결국 머릿속에서 나 스스로 만들어낸 마음이었을 뿐. 아이들은 그런 나의 걱정과 전혀 다르게 너무나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잊고 살다 우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금 다짐한다.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집어넣어도 좋겠다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아이를 마음껏 사랑해주자고. 아이에 관해서는 엄마 마음처럼 미리 불안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용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