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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Oct 26. 2022

Goodbye, 영원한 나의 고향

나의 유년에 나의 아이들이 잠시 머물다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곳

이곳은 커다란 미로다. 출구가 사방팔방으로 나있어 어디로든 나갈 수 있는 미로다. 미로의 여러 가지 방향을 따라 헤매는 무용한 시간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길을 택하냐에 따라 펼쳐지는 광경이 달라졌다. 만나지는 사람이 달라졌다.

봄에 걷기 좋은 길이 있고 가을에 걷기 좋은 길이 있다. 그곳에 25년이란 세월을 살아오며 비 오는 날에는 굳이 돌아서라도 선택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벽과 저녁에 따라 아름답게 드리우는 해와 그림자를 마주하기 좋은 길이 어디에 있다는 것쯤은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알게 된다.



나는 초등학교 후문에서 걸어 나와 5층짜리 건물로만 이루어진 1단지 한가운데 인도를 걸어 하교를 하곤 했다. 차도와 인도의 구별이 모호한 오래된 동네에서 차와 오토바이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인도는 여러 차례 덧대진 흔적이 가득했고, 고양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늘어져 낮잠을 잤다. 집중하여 걷지 않으면 울퉁한 보도블록에 발 앞 뿌리가 걸려 고꾸라지곤 하였기에, 눈은 여기저기를 살피더라도 발은 꼿꼿이 지금 디디고 있는 바닥을 온전히 의식하며 걸어야 하는 구간이기도 했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터널을 마련했고, 등나무 꽃의 라벤더색은 지저분한 바닥을 이내 보석같이 수놓았다. 그 빛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이 길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뻔질나게 이용하던 구간이었다가 첫 아이를 낳고 다시 매일 드나드는 길이기도 했다. 아이가 고양이와 함께 마주하는 모든 시간을 이 길과 함께 했다. 세월이 흘렀음을 보여주듯 녹이 슨 건물과 닳은 아스팔트,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동일했다. 꽃내음 역시도.



이 공간에 들어오면 시간을 잊는다. 신비한 공간이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유정의 집 앞에 머물고 2층 창문을 향해 '유정아, 학교 가자.'하고 외치면, 유정이 나온다.

성당으로 가는 가운데 쪽문으로 빠지기 직전, 베란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친다.

"성연아, 나 여기 나왔다. 가자."

미사포 가방만 달랑 들고 성연이와 함께 성당으로 냅따 달린다.

메타세쿼이아가 가득한 길은 지민이와 함께 무더운 날 거대한 가방을 메고 학교를 오갈 때 그늘막이 되어주던 길이다. 길 끝자락까지 오면 남중 남고 아이들의 등굣길과도 겹쳐지곤 했다. 그 구간을 통과해 아파트를 벗어나 왕복 12차로의 큰길을 건너야 하는 관문은 수줍은 여고생에게 언제나 큰 도전이었다.



무거운 책가방에 짓눌려 잠시 올려다본 하늘은 10층을 족히 넘는 키의 높은 메타세쿼이아들로 가려져있다. 이곳에서는 온갖 색을 볼 수 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색이 한 곳에 다 모여있는 곳, 이곳은 가을에 걸으면 제격인 길이다.

맹꽁이 울음소리가 가득한 바로 옆 늪에서는 시골의 정취를 마음껏 맛본다. 커다란 잎을 쓰고 양산을 만들기도 하고 겨울이면 스케이트 하나 달랑 들고 못에서 스케이팅을 하기도 한다. 조금 더 걸어 나가면 일자산으로 통하는 길목, 그곳에는 방방이(트램펄린) 아저씨가 오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름답게 포장된 산길로 바뀌고 더 이상 방방이 아저씨는 오지 않고, 스케이트를 타던 연못은 그린벨트로 묶였다. 오로지, 메타세쿼이아 길만 그대로였다.



실로 신비한 공간이다. 이 공간에 서면 나이를 잊는다. 지금이 언제인지 모른 채, 그저 오래된 흙길을 걷게 된다. 길에서 만난 강아지가 옆집 지선이네 강아지인지 내 딸 안이의 친구 재선이네 강아지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내가 손을 잡고 길을 가고 있는 친구가 지민인지 그녀의 아들 정의 엄마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초등학교 친구,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가 모두 모여 사는 곳에서 십여 년을 함께한 친구들은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헤어졌다가 아이를 낳고 다시 모이기도 했다.



다시 옆 동에 지민이가 살았고 앞동에 유정이가 있었고 성당으로 빠지기 전 길에 성연이가 살았다. 그곳에는 정확히 그녀들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지만, 그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다시 찾은 유년에는 우리의 아이들이 함께였다. 그 늘어진 시간의 기나긴 햇살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만나는 고양이마다 이름이 생겼다.



그저 길을 걷기만 해도 거미 친구, 고양이 친구, 개구리 친구, 온갖 이름 모를 친구들이 생기던 시절을 이곳에서 맞는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구분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이 삼십 대의 아이를 키우는 사람인지, 십 대의 학생인지를.

이 신비로운 공간이 무참히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어느 날, 이곳에 커다란 크레인이 올라오고 옥상에 포클레인들이 들어앉았다. 어제 있던 건물이 오늘 보니 사라졌다. 뻥. 뚫린 공간. 빈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있던 건물은 내일 사라질 것이다.



지민과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건물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함께 한 공간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본 지민과 나는 서로의 손을 잡는다. 멍하니 선 우리들은 말했다.

"봤어?"

"응."

"없어졌어."

"응."

"영원히. 사라졌어."

"응. "

"이제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어."



그곳은 이제,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25년간 마음에 담고 담아 이제는 온 힘을 들여 추억해야 마음에 보이는 곳이 되었다.



*친구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보석같이 수놓아진 등나무 꽃잎 카펫


고양이를 찾는 나의 딸을 물끄러미 뒤에서 바라보는 고양이


어디서든 마주하는 고양이와의 시간들
그 길을 걷다 보면 나는 (당시)삼십 대의 아이 엄마인지 십 대의 학생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유정이 떠나버린 유정의 집 앞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곳


그 시골길 같은 공간은 신비로운 곳으로 남아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없어? 응. 이제는 없어졌어. 영원히.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어.


나의 유년에 나의 아이들이 잠시 머물다가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곳,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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