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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Oct 27. 2022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풍경들

우리 집, 공간 그 이상의 가치

"어머! 여기는 어쩜 이렇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동생 친구 욱이가 십여 년 만에 우리 집을 찾아 했던 말이다. 엄마는 살림을 정말 못했다. 엄마의 입으로도 늘 말씀하셨다. 

"나는 영 살림을 못해."

나의 똥 손 살림 센스는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늘 당당했다. 엄마는 "나는 살림을 영 못해."라고 말한 그 뒤에는 "어쩌라고!"가 생략된 사람 같았다. 퇴근하고 온 아버지는 늘 개탄하셨다.

"이런 집에 들어오면 화가 나야 정상인데, 어째 아무도 이 지저분한 꼴을 보고 화가 나는 사람이 없느냐! 어째서 아무도 이런 집 상태를 보며 '치워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냐"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아버지의 청소가 시작되었다. 퇴근 후 청소와 정리는 어쩔 수 없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의 몫이었다. 지금의 우리 집 모습과 너무다 다를 바가 없는 현실에 헛헛한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 엄마의 살림 꽝 센스로 인해 우리 집 가구는 한번 자리를 잡으면 단 한 번도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그 집은 1992년부터 2017년까지 25년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존재하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였다. 정말 가구 하나의 배치도 바뀌지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25년을. 단지 나의 집이었다가 친정집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은 동일하였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의 장난감이 자리 잡았을 뿐, 역시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엄마는 살림뿐 아니라 버리는 것 또한 잘 못하셨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아버지도 비슷하셨다. 다행히 청소와 달리 버리기 담당은 담당자가 없었다. 그 덕에 우리 집에는 나의 초등학교 1학년 일기부터 모든 그림, 상장, 트로피, 아주 아가 때 쓰던 장난감, 옷가지 등이 그대로 모아져 있었다. 공간은 늘 그대로였다. 모든 가구와 집안의 물건들은 기본이 몇십 년씩 되었다. 그 안을 채우는 물건만 살짝 바꾸면 언제든 타임머쉰을 탄 듯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의 집이었다. 


그렇게 나는 종종 공상에 빠지곤 했다. 내 방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열두 살의 소연이가 앉아있는 착각도 들고, 스물두 살의 소연이가 앉아있는 착각도 들고, 서른두 살의 소연이가 앉아 잇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책상 바로 옆에는 컴퓨터 다이가 있다. 그 옆에는 피아노. 그리고 창문이다. 나의 방은 서향이어서 정말 끝내주는 노을을 볼 수 있었지만, 길고 긴 저녁 해를 고스란히 맞아 늘 덥게 덥혀지는 우리 집에서 가장 더운 공간 중 하나였다. 마지막까지도 에어컨이 없었던 우리 집이기에, 한여름의 내 방은 정말 있을 곳이 못되었다. 올림픽 공원은 그렇게 나의 제2의 피난처가 되었다. 너무 더워서, 울컥하는데 집에 있기 싫어서 등의 이유로 종종 나는 나의 방을 탈출하곤 하였지만, 사실은 우리 집에서 전망이 가장 트인 내 방을 사랑했다. 



책상 반대 벽에는 붙박이 장이 있었는데, 그 장에는 이불가지가 가득했고, 살짝 빈 공간에는 원수연의 풀하우스 전권이 꽂혀있었고, 안쪽 벽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나의 조용한 보물창고였는데, 첫째 아이를 낳고 어느 날 친정에 갔다가 그 방에서 아이를 재우며 드러누웠다. 붙박이장 안쪽에 언제 적 글씨인지 나의 글씨로 두 줄이 적혀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유독 두통이 잦았다. 지금 추정컨대 워낙에 소심한 성격에 관계를 겪어가며 얻는 스트레스들을 풀 곳이 없어 머리가 아팠던 것 아닌가 싶지만,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면 엄마에게 야단맞을까 두려워 말하지 못하는 아이였기에, 붙박이장 안쪽 벽 턱에 아주 작게 낙서를 해 놓았던 것이었다. 



화장실은 나의 방 반대쪽에 하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화장실 눈치 작전이 시작된다. 동생과의 화장실 쟁탈에서 밀릴 때, 싱크대에서 머리를 감다가 엄마에게 무진장 혼난 기억이 난다. 오래되고 높은 싱크대에는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붙여놓고 간 멍멍이 스티커 두 개가 92년도 이전부터 있었는데, 아무리 뜯으려 해도 뜯기지 않아 그 멍멍이와 스물다섯 해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이 외할미 집에 올 때마다 멍멍이 스티커를 보고는 "멈머!"라고 외쳐댔다. 싱크대에서 녹물이 나올 때면, 물을 빼고 씻다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그냥 녹물로 씻어대기도 했다. 녹의 냄새와 곰팡이의 냄새는 오래된 나의 일부가 되었다. 여기저기 누수로 인해 하루는 천장을 뜯고 다시 하고, 하루는 방 천장을 뜯고 다시 하기를 반복하였는데.....



그 집이 헐려 없어졌을 때, 모두가 울었다. 803호 언니들도, 304호 아주머니도, 701호 아저씨도... 한 집 씩 한 집 씩 이사를 나가 한 층에 우리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허전함에 복도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 거기에는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남자아이가 해놓은 낙서의 흔적도, 우리 아이가 아장아장 걸으며 외할미 집에 온다고 하면서 잡고 다닌 시꺼먼 손 떼도 그대로였다.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는 10층을 훌쩍 넘어 자랐다. 나의 방에서 내려다보는 저만치 롯데타워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모든 이별은 슬프지만 늘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서 참을 수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정말 "마지막"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곧 헐려 없어질 우리 집은 헐렸다.

이제는 돌아갈 집이 없다. 이제 돌아오더라도 이곳은 내가 그리던 기억 속의 그곳이 아닐 테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했던 그 나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엄청난 세콰이어 길은 살릴 수 있는 것일까? 울창한 나무 숲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공간을 다시 볼 수 없어 매일같이 사진을 찍어 남겼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새로운 내가 그 풍경에서 웃고 있다. 마음속에 가득 담긴 채 다시는 볼 수 없는 선명한 기억들을 마주한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올라오는 길 가장 초입에서는 라일락 향기가 끝내줬는데 그래서 간혹 앞에 가는 사람이 담배라도 피우면 그게 그토록 야속했다. 라일락에 취해 나의 발걸음은 늘 느려졌다. 벚꽃도 끝내주었는데, 꽃구경을 하러 어디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아파트 벚꽃이 최고였으니까. 은행나무 역시 똥냄새 지뢰 폭탄 길을 한없이 뽑아내었다. 그 길을 걷노라면 중학생 시절 깔깔 거리며 걷던 나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은행 똥 지뢰를 피해 걷던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겹쳐진다. 오랜 시간 함께 하던 오래된 벗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이곳은 없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우리 집이 있던 자리, 나의 모습은 전혀 다른 그림으로 그려질 것이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 곰팡이 가득하고 녹물이 흘러도 그 세월 한자리를 꿋꿋이 지켰던 그 나무들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시절도 흘려보내야겠지.

그리울 때 꺼내보는 사진으로나마 저 깊이 숨겨놓은 나의 기억으로나마 다시 만나면서 말이다. 



친정집, 나의 방에서 바라본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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