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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Oct 28. 2022

그녀 안의 그녀

세상의 모든 강사들에게

해가 중천에 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시간을 알 수가 없다. 그녀의 집은 성능이 좋은 암막커튼이 단단히 쳐져있다. 여전히 한밤 중이다. 그녀의 남편은 새벽같이 통근버스를 타고 나갔으나, 그녀는 그가 언제 나갔는지 알 길조차 없이 곤히 잔다.


방학이 다. 그녀는 암막커튼을 반쯤 열어둔 채 잠이 든다. 새벽에 출근하는 그의 소리를 의식한다. 크게 세팅한 알람 소리가 들리면 힘겹게 자리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 커튼을 마저 활짝 저치고 이른 아침의 해가 집안을 드리우는 것을 바라본다. 그녀의 집은 동향, 그럼에도 아침에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아침밥을 챙겨 먹다. 지금 먹지 않으면 밤 아홉 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입맛이 있던 없던 생존과 연결된 위장 채움, 그녀는 냉장고 속에 존재하는 음식 재료들을 유심히 살펴놓는다. 이를 닦고 정성을 들여 화장을 하고 렌즈를 낀다. 몇 벌 없는 옷 중에서 오늘 입고 싶은 옷을 하나 고르고, 운동화를 신고, 실내화 가방 안에 굽이 낮은 구두 하나를 비닐에 싼 채 집어넣는다. 현관 밖을 나오며 나지막하게 외친다.

"오늘도 파이팅!"

이 한마디의 자기 최면이 부디 하루를 마칠 때까지 유효하길 바라면서.


방학특강이 시작되었다. 방학특강은 10시에 시작하여 2시까지 진행된다. 곧이어 정규 수업은 오후 2시부터 밤 9시까지 이어진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수업을 하는 시간만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다. 연강이다. 중간에 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 기능성 셰이크를 늘 챙겨간다.


수업을 하는 시간 외에 그녀에게 필요한 시간은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 첨삭 및 피드백에 소요되는 시간,  학부모 상담을 진행하는 시간 등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원 게에서는 이런 부수적인 시간들은 고려되지 않은 채 수업만으로 평가되거나 시간표가 배정되는 현실이다.


이번 특강 중에 그녀가 맡아 개발한 커리큘럼은 철학을 영어로 연계하여 글쓰기를 하는 것이었다.  철학이라는 말을 거창하게 갖다 붙이긴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해볼 거리가 있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는 것이었고 그에 의한 독후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이되 영어 스킬 중에서는 쓰기 활동, 즉 라이팅에 좀 더 초점이 맞춰진 수업이었다.

예를 들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사랑에 대해 토론하고 쓰는 형식의 수업이 좀 더 정교하게 커리큘럼화 되어 수업에 녹아있는 형식이었다.

 강사 중에는 그런 커리큘럼이 주어지면 수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있었으나, 자신이 직접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텍스트북을 만들 사람이 없었기에 특강 이전에 이미 그녀는 미리 큰 뼈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위한 세부적인 것은 학습자들의 그날의 수업태도, 컨디션, 성향, 학년, 성별 등을 고려하여 조금씩 변하므로 열어둔 채 말이다. 이렇게 열어둔 부분은 수업을 해나가며 학습자와 조율하여 같이 나가는 부분이다. 그렇다. 점심시간도 부재한 그녀의 꽉 찬 하루가 펼쳐진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10시 퇴근의 날들이다.


다행히 이 시기는 짧고 지나가고 일 년에 두 번 밖에 없다. 간혹 방학이 길어 여름특강을 1,2차로 두 번에 나누어해야 하는 불상사만 없다면 이것도 할만하다 여긴 젊은 날이었다.

그녀는 일을 사랑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변화하는 학습자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보람찬 일이었다. 간혹 골치를 썩이는 어린이 학습자들도 있었으나, 어린이라는 시기는 참으로 신기하여 강사의 진심이 닿으면 언제나 변화한다. 그것은 진리였고, 기다림의 시기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며 진심을 전달하곤 했다.

 그녀는 어린 학습자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놀며 소통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프로페셔널했다. 생리통으로 힘든 날도, 출근 전에 먹은 아침으로 밤 8시쯤 되었을 무렵 위가 찢어질 것처럼 허기짐을 안고서도, 그녀는 학습자들 앞에서 활짝 웃었다. 마치 그곳이 그녀의 무대인 냥!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녀는 전형적인 I로 시작하는 MBTI성향을 지녔다. 그러나, 일에 있어 프로페셔널해야 함을 안고 이 사실을 극복한다. 그녀가 가진 작은 무대, 찡그리고 힘든 표정 대신 활짝 웃으며 높은 톤의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에너지를 전한다. 돌아오는 똘똘한 눈방울에 힘을 받으며...

쉬는 시간에 엉덩이라도 붙이고 싶어 앉으면 이내 아이들이 쪼로로~ 달려와서 묻기 바쁘다. 선생님은 몇 살이냐, 남자 친구 있느냐(남편이 있다.), 어디 사냐 그러더니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어린이들의 TMI(Too Much Information, 굳이 몰라도 될 정보들)를 꺼내 보인다. 누가 누굴 좋아한다느니, 얘네 둘이 싸웠다느니, 쟤는 애가 좀 어떻다더니...


교실은 늘 활기차고 소리로 가득 찬다. 의자 끄는 소리, 산만한 녀석들의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 크게 외치는 영어문장들, 소심하게 발표하는 떨리는 스피치. 그녀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는다. 수업을 하며, 학습자들의 활동 참여 태도, 실력 등을 유심히 관찰하여 일지에 적는다. 중간중간 상담전화가 필요한 경우, 쉬는 시간을 이용해 전화를 하고 픽업하러 오는 학부모에게 밝게 인사를 하며 학습자의 근황을 전달한다. 밤 9시 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말 그대로 그녀는 처음으로 의자에 편히 앉는다. 모두가 돌아간 빈 교실은 고요하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트릿으로 주는 마이쭈를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배고픔을 달랜다. 그리고, 각 반마다 상담에 필요한 사항을 적고, 다음날을 위한 수업 준비를 마저 마친다. 특강 전에 강사 양성과정용 세미나를 한번 했었고, 특강 후에 강사들에게 다시 특강 마무리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이므로 그 점을 염두에 두며 강사 회의에서 필요한 사항들도 빠짐없이 체크한다.


엉덩이 한번 붙이고 앉을 새 없이, 밥은 커녕 물 한잔 마시기도 빡빡한 스케줄이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다리는 이내 후들거린다. 힘든 일이라고 단연코 말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회사 시절보다 힘든 건 확실하다 여긴다. 그러나, 공장 일은 이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직종을 바꾸기 전, 취업한 기업에서 한 연수를 생각한다. 생산 라인에서의 2박 3일 체험은 그녀에게 극한의 체력 한계를 체험하게 했다. 하루 종일 서 있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다. 그녀도 현재 하루 종일 서 있다. 어쩌면 서 있는 시간은 생산 라인에서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녀는 말을 할 수 있다. 똘망한 눈을 볼 수 있다. 매일 고유한 자신의 수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서 있는 시간이 길지만 그만큼 다른 요소들이 그녀를 살게 해주는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그녀는 이 일을 사랑했다. 한 번의 수업은 지나가버리면 영원히 과거가 된다. 다시 복습을 하더라도 이미 전의 수업과는 다른 새로운 수업이 된다. 단 한 번의 수업, 그 수업을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쏟는다. 어린이 학습자라 다행이라 여기며.


 어린이들은 그녀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런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수업을 하는 복을 여긴다. 그녀는 진심을 담는다. 커리큘럼 개발에, 교재 개발에, 수업 준비에, 수업 중에, 숙제 검사에, 피드백에. 진심은 학부모에게는 통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어린이들에게는 반드시 통한다. 그들은 결코 마음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그녀가 이 시기를 지나면서도 웃을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당시의 학습자들의 나이만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필드를 떠난 지 오래다. 이 시절 얻은 만성 성대결절을 달고 산다. 그러나, 그녀 안에는 여전히 '이 시절의 그녀'가 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의 학원 선생님들께 늘 예의를 갖추고 약속을 소중히 여기며,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학부모로서 표현할 수 있는 진심을 담아 하루를 사는 새로운 세상 안에서  그녀는 아득히 멀어진 자신의 과거를 향수에 젖어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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